-나는 활보다
오드리는 가을에 톰을 만나 겨울, 봄, 여름을 보내고 두 번째 가을, 겨울을 지나 봄에서 막 여름으로 이어질 무렵에 그만두었다. 삼 개월 모자란 2년 동안 일하면서 단 하루도 때려치워야겠다는 생각을 안 한 적이 없다. 그럼에도 비교적 긴 시간을 버텼다는 게 새삼 놀랍다. 톰은 술이 취했을 때와 맨 정신일 때의 인격이 달랐다.편의상 나쁜 톰과 착한 톰으로 나눈다. 나쁜 톰이 술 먹고 사고를 치면 착한 톰이 쩔쩔매며 그 일을 수습했다. 착한 톰은 인정이 많고 낙천적이고 호기심이 많았다. 잠시도 가만있지 않고 여기저기 쏘다니며 사람들을 만났다. 그리고 그들이 필요로 하는 일들을 도와주었다. 예를 들면 마야가 밤에 기름이 떨어져 보일러 작동을 못한다 하면 기름 한 통을 사다가 가서 부어주었다. 지인의 개가 새끼를 낳았는데 다 키울 형편이 안 되어 유기하려 하자 여기저기 수소문하여 새끼들을 입양시켰고, 나중에 그 개가 잘 크고 있는지 수시로 들러 살피기도 했다. 그런 의외의 모습이 오드리의 마음에 깊은 인상을 남겼고 착한 톰이 진짜 톰이라는 믿음을 갖게 했다.
톰은 식후에 꼭 믹스커피를 마셨다. 오드리한테도 같이 마시자고 해서 자연스럽게 식탁에 마주 앉아 커피 타임을 가졌다. 톰은 어린 시절이나 고향의 부모형제, 왕년에 잘 나갔던 때의 이야기와 지금 현재 주변 지인들의 이야기를 주로 했다. 레퍼토리는 똑같았지만 삼십 분 남짓한 그 시간이 톰과 보낸 가장 평화로운 시간이라 할 수 있다. 꽤나 동화 같고 낭만적인 일화도 있었다. 톰은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서울로 올라와 이 일 저 일 전전하다가 스물한 살에 우연히 한 여대생을 만나게 된다. 국문학 전공인 그녀는 예쁘고 상냥했다. 톰을 진심으로 좋아하고 잘 되기를 바랐다고 했다. 톰도 그녀를 좋아했지만 그럴수록 자격지심도 커졌다. 톰은 일부러 그녀에게 상처를 주고 못되게 굴었다. 그 뒤 여자는 결혼과 함께 이민을 떠났다. 거기까지가 톰이 오드리한테 들려준 첫사랑 이야기다. 그녀 얘기를 할 때 톰은 착한 톰 중에서도 가장 착한 톰이 된다.
톰은 가끔씩 폰에 뜨는 국제전화번호를 볼 때마다 혹시 그녀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톰은 시간은 많고 말할 상대는 없어서 걸려오는 전화는 무조건 받고 쓸데없는 내용도 끝까지 들어준다. 그런 그가 어쩌다 놓친 국제전화번호를 보며 그녀일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는 것이다. 오드리는 첨에 톰이 농담을 하는 줄 알았다. 헤어진 지 사십 년이 다돼가는 첫사랑 여자가 아직도 자기를 못 잊고 있을 거라는 믿음이 가능한가. “그런 거 다 보이스피싱 전화예요. 아예 받지 마세요." 오드리는 단호하게 말했다. 말 많은 톰이 그 순간은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오드리는 아차 싶었다. 톰한테는 사실 여부를 떠나 그런 상상 자체가 한가닥 희망일 수도 있는데 말이다. 착한 톰은 마음 깊은 곳에 어린아이의 순수를 간직하고 있었다. 어린 시절의 그 언덕에서 자신의 편이 되어 줄 단 한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혼한 부인을 기다리고 있는 것도 착한 톰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톰은 특유의 센스와 사교성으로 술집 지배인 일에 수완을 보였다. 사장도 믿고 맡길 정도로 신임을 얻어 보너스도 많이 받았다. 그즈음 부인과 만났다. 부인은 전남편 아이 둘을 키우고 있었는데 당시 초등생이던 아이 둘을 대학까지 보낼 만큼 톰은 이런저런 계산을 따지지 않았다. 다만 그 과정에서도 나쁜 톰의 술 문제와 폭력성은 존재했을 것이다. 부인은 친정어머니의 간병 때문에 지방에 내려간 걸로 돼 있다. 톰은 친정어머니가 돌아가시면 부인이 다시 돌아올 거라고 믿고 있다. 그래서 톰은 부인과 살던 그 집을 유지하고 있다. 방 두 개에 거실까지 있는 빌라인데 거실에서만 생활하는 톰에게 방 두 개는 필요 없는데도 그대로 산다. 어차피 재개발을 기다리는 낡은 집이라 주인도 월세를 올리지 않고 그냥 내버려 두긴 하지만. 마야를 비롯 그 빈방에는 여러 사람들이 스쳐갔다. 톰을 보면 가는 사람 안 잡고 오는 사람 안 막는다는 말이 딱 들어맞는다.
착한 톰은 활보한테도 크게 요구하는 게 없었다. 청소 빨래 같은 건 모아서 일주일에 한 번만 해도 된다고 했고 밥이나 국도 한번 해놓으면 며칠 갔다. 밑반찬은 오드리가 집에서 만들어 왔다. 톰은 집에 있는 걸 싫어했고 빨리 나가고 싶어 오드리 일이 끝나는 걸 기다리는 동안에도 몇 번이나 엉덩이가 들썩거렸다. 딱히 용건도 없이 전화 오는 데가 많았다. 세 시간 일할 거 한두 시간 만에 오드리는 쫓기듯이 퇴근했다. 오드리는 퇴근길에 톰이 가는 집까지 함께 가주었다. 시각장애인의 외출 시 동행은 기본이다. 톰은 혼자 다닐 수 있지만 오드리와 이야기하며 걷는 걸 좋아했다. 톰이 지인의 집에 들어가기 전에 오드리는 편의점에서 소주 두 병을 사준다. 오늘은 제발 얌전하게 그것만 먹고 끝내기를, 기도하는 심정으로 헤어진다. 술 먹는 나쁜 톰만 잘 견디면 나머지 시간은 착한 톰이 지배하기 때문에 오드리가 일을 계속 해올 수 있었는지 모른다.
가족이나 보호자가 없다는 점도 처음에는 장점으로 작용했다. 일은 일대로 하면서 보호자의 눈치도 봐야 하고 비위도 맞춰야 할 때가 많은데 톰은 아무도 없어 홀가분했다. 무슨 일이든 톰하고만 협의를 하면 되니까 일처리가 간편했다. 그런데 점차 단점이 드러났다. 일단 톰 혼자 두고 퇴근할 때 마음이 안 좋았다. 보호자가 있으면 근무 시간에만 이용인한테 집중하고 퇴근 후는 잊어버리면 된다. 하지만 톰은 퇴근 후가 더 문제였다. 돌아다니며 무슨 사고를 치고 있을지 아니면 집에 혼자 외로이 있는지 이래저래 신경이 쓰였다.
주말이 제일 불안했다. 이틀 못 본 사이에 또 무슨 큰일이 터지지나 않았는지 두려웠다. 전화가 오면 오는 대로 화가 나고 조용하면 조용한 대로 심란했다. 모르는 번호는 거르면서도 혹시 톰과 관련된 연락일까 봐 마음이 불편했다. 24시간 언제 터질지 모를 폭탄주머니를 안고 사는 꼴이다. 보호자가 있다면 근무 시간 외의 그런 스트레스에서는 해방될 수 있다. 그래서 차라리 전 부인이 와줬으면 싶을 때도 있었다. 물론 부인이 오면 주로 가사를 전담하는 오드리가 더 이상 필요 없을 수도 있지만.
일이 편하고 퇴근을 빨리 하고 잔소리할 보호자가 없다고 마냥 좋아할 일은 아니다. 세상에 공짜는 없으므로 오드리는 그만큼의 대가를 치러야 했다. 매일 집에서 밑반찬을 만들어 날랐고 커피나 휴지 등 생필품이 떨어지면 오드리가 사서 메꾸었다. 가끔은 세일 매장에서 톰의 옷이나 양말도 사줬다. 어떤 식으로든 오드리가 이익을 본 시간만큼의 보상을 해야 했다. 톰이 구체적으로 뭘 요구한 적은 없지만 그 룰은 암묵적으로 통했다. 물론 나쁜 톰한테 당하는 괴로움도 그 계산에 충분히 넣었다. 겉으론 티 내지 않으면서 속으로는 매 순간 각자의 이익과 손해를 따지고 계산하는 그런 상황이 오드리는 거북했다.
도로시 때처럼 정시에 출퇴근하면서 아무런 마음의 거리낌 없이 일하고 싶었다. 톰의 상황과 요구에 맞춰 형성된 근무 패턴이긴 하지만 떳떳하지 못하다는 느낌은 줄곧 오드리를 괴롭혔다. 부정수급에 관한 센터 교육을 다녀올 때면 기분이 더 처참했다. 톰을 떠나야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다는 건 분명했다. 하지만 다른 이용인을 만나도 어차피 어떤 갈등이든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그럴 바엔 착한 톰한테 의지하며 하루하루 버티는 수밖에 없었다.
톰은 의료비가 전액 무료라 수시로 병원을 다녔다. 끊을 생각도 없으면서 재미로 금연 클리닉을 다니고, 대장내시경 준비물을 무료로 다 받아와서는 당일 술 때문에 펑크를 냈다. 지인들이 부탁하면 겔포스 같은 위장약이나 파스, 인공눈물 같은 걸 처방받아 와서 나눠 주었다. 나랏돈이 줄줄 새고 있는 것이다. 한편 넓게 생각하면 기초수급자 기준의 경계선에 있는 사람들이 그렇게 약간의 도움을 받는 것이 뭐 그리 나쁜 일일까 싶기도 했다. 동네 김 내과는 어찌나 뻔질나게 드나들었는지 의사나 간호사들 모두 톰을 잘 알았다. 그 동네에서만 사십 년을 개원중인 늙은 의사는 다소 무리하다 싶은 톰의 요구에도 선선히 처방전을 써 주었다. 한 번은 톰을 먼저 내보내고 오드리만 남으라 하더니 혹시 저 자가 손버릇이 나쁘진 않은지 넌지시 묻기도 했다. 의사는 흥미로운 대답을 기대하며 오드리를 쳐다보았는데 그 눈길이 오히려 톰보다 더 느끼했다. 오드리는 그런 일 없다고 잘라 말했다.
톰이 수작을 부린다 싶은 행동을 전혀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어릴 때 일찍 죽은 여동생 얘기를 눈물까지 찔끔거리며 하고는 오드리가 동생 같아서 잘해주고 싶다고 한 적이 있다. 또 오드리가 집안살림을 다 살아주고 자기 빤스까지 빨아주니까 마누라나 마찬가지라는 소리를 하며 처웃기도 했다. 설거지하는 오드리의 뒤태를 찍기도 했다. 분명 찰칵하고 폰 카메라 찍는 소리를 들었는데 톰은 시침을 뚝 뗐다. 시각장애인이 몰카라니! 하지만 폰을 빼앗아 볼 수도 없고 벗은 몸을 찍은 것도 아니니 그냥 넘어갔다. 그 외에도 톰이 뭔가 이상한 얘기를 꺼낸다 싶을 때마다 오드리는 모른 척 화제를 돌렸다. 남자 이용인을 상대하자면 그 정도는 각오해야 한다. 명백한 성희롱이나 신체 접촉만 아니면 오드리는 그냥 넘어간다. 농담인 양 은근슬쩍 내뱉는 수작질도 정서적인 추행으로 걸고넘어질 수 있지만 그것까지 따지고 들면 이 일 못한다.
톰은 나 꼬라지 있어요,라는 말을 자주 했다. 어디 사투리 같은데 나 성질 있다, 물로 보지 마라 뭐 그런 뜻으로 쓰는 것 같았다. 나라와 타인의 도움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 톰의 마지막 자존심 한 조각이 바로 그 '꼬라지'였다. 결국 오드리가 그만두게 된 결정적인 계기도 꼬라지라고 할 수 있다.
톰은 신용불량인 지인이 핸드폰을 개통할 수 있도록 명의를 빌려주었다. 톰이 형님이라고 부르는 그 사람은 핸드폰 결제 한도를 다 쓰고 통신요금도 밀린 상태에서 잠적해 버렸다. 톰 앞으로 독촉장이 날아왔다. 톰은 열이 받아서 그 형님이라는 인간을 찾아 헤맸다. 별 소득 없이 밤새 술만 먹고 집으로 돌아온 톰은 마침 출근한 오드리한테 술주정 같은 화풀이를 했다. 당장 통신사에 전화해 보라고 방방 뛰었다. 명의를 빌려주고 술 한잔 얻어먹을 때는 이런 일이 벌어질 줄 몰랐을까.
아무튼 그 일로 통신사 상담원과 통화를 하게 되었다. 톰은 만취 상태라 혀가 꼬였다. 할 수 없이 오드리가 대신 내용을 설명했다. 그런데 상담 과정에서 본인 확인이 필요했다. 지금 옆에 있다고 하니까 상담원은 그럼 잠깐 목소리만 들려 달라 했다. 오드리는 지금 이 분이 술이 취해서 전화를 받을 수 없다고 하였다. 그 말에 식탁에 엎드려 있던 톰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런 말을 왜 하냐고, 자기는 술 안 취했다고, 버럭버럭 소리를 질렀다. 오드리는 너무 놀라서 일단 전화를 끊었다. 톰은 평소에는 술 취했다는 말에 그렇게 예민하지도 않았으면서 그날따라 그 말에 꼬투리를 잡고 시비를 건 것이다.
톰은 날을 잡은 듯이 왜 술 취했다고 했냐 그거 하나 가지고 계속 물고 늘어졌다. 원래의 용건 따위는 물 건너갔다. 오드리가 실수였다, 말이 잘못 나갔다고 사과했지만 소용없었다. "아니 그러니까 왜 그런 소리를 하냐고요? 내가 어딜 봐서 술이 취했냐고요!!" 같은 말의 반복이 몇 번이나 이어졌다. 했던 말을 똥개 훈련처럼 반복하다가 오드리는 불쑥 톰의 면상에 대고 외쳤다. “선생님만 꼬라지 있어요? 나도 꼬라지 있어요!” 그리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앞치마를 풀고 가방을 챙겼다. 분노와 흥분으로 호흡은 가빠지고 땀은 줄줄 흐르는데 가슴은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오드리가 현관에서 신발을 신을 때까지도 톰은 눈만 끔벅거리고 있었다.
오드리는 곧장 센터로 가서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언젠가 인내심의 한계를 맞이할 줄은 알았지만 엄청난 사건도 아닌 이 정도 일로 끝이 날 줄은 오드리도 몰랐다. 담당자는 기본적으로 활보가 고충을 얘기하면 자기가 이용인한테 잘 얘기해 보겠다, 웬만하면 활보가 참고 양보하는 게 낫다는 식으로 중재 역할을 한다. 하지만 지난 2년간 단 한 번도 문제를 제기하지 않던 오드리가 단번에 그만둔다고 하자 돌이킬 수 없음을 알아보았다. 담당자는 오드리의 얘기를 들어주면서 그동안 애썼다, 고생 많았다는 말을 여러 번 했다. 의례적일 수도 있는 그 말에 오드리는 툭, 울음을 터뜨렸다. 담당자가 다른 일 때문에 자리를 비운 후에도 오드리는 계속 눈물을 쏟았다. 나중에 보니 거의 한 시간이나 울었다. 지금껏 톰 때문에 아무리 힘들었어도 운 적은 없었다. 그저 마음이 괴롭고 답답하고 무거웠을 뿐이다. 눈물은 가장 기본적인 감정 표현인데 그것조차 불가능할 만큼 엄청난 스트레스에 억눌려왔다는 것을 오드리는 그날 깨달았다.
오드리는 톰의 전화를 차단했다. 끝이 안 좋게 난 경우는 그 방법밖에 없다. 몇 개월이 지났을까, 한 번은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와서 무심코 받았는데 마야였다. 마야는 톰이 많이 반성하고 있다고, 이제 술도 끊었다고, 톰이 원하는 활보는 오드리뿐이라고, 어차피 계속 일할 거면 톰이 편하지 않냐고, 주저리주저리 읊었다. 오드리는 얘기를 다 들어준 다음 이미 다른 사람 일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마야한테도 쌓인 게 많았으나 다 끝난 마당에 따져봤자 부질없다는 생각에 오드리는 차분하게 대응했다. 활보 자리가 그렇게 빨리 구해지는 거였어요? 진짠지 의심스럽다는 목소리로 마야는 전화를 끊었다.
그동안 톰의 집 근처를 지날 때나 식당, 편의점 등 톰이 자주 출몰하던 장소를 지날 때면 혹시 마주칠까 긴장했는데 단 한 번도 톰을 볼 수 없었다. 안 보이는 기간이 길어지니까 새로운 걱정이 생겼다. 어디가 아픈가, 또 잡혀갔나,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그러던 차에 마야의 전화를 받고 나니 안심은 되었다. 마야를 시켜 전화를 한다는 것은 톰이 아직 살아있고 여전히 그치들과 어울리고 있다는 뜻이다. 살던 대로 사는 것이 톰으로서는 가장 행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