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아이가 10시 넘어 어린이집에 등원을 했습니다. 원의 스케줄상 점심을 좀 이르게 먹는 편이라 늦게 등원할수록 함께 놀이할 수 있는 시간이 많이는 없을 텐데 어김없이 지각을 하는 아이였습니다.
그런 아이를 가만히 보고 있자면 '늦게 일어났을까? 어젯밤 늦게 잠들었나? 아침부터 무슨 일이 있었을까?'라는 별의별 생각을 하곤 합니다.
한 선생님이 지나가다 "오늘도 늦었네."라고 마치 넌 원래 그런 아이라고 생각하시는 것 마냥 얘기하셨습니다. 그런데 다른 선생님은 제게 다가와 이 아이가 오늘 늦은 이유에 대해서 얘기해 주셨습니다. "아이는 일찍 일어났는데 엄마가 늦게 일어났다고 그래서 엄마 기다리다 늦은 거래요."라고 말이죠.
아이는 늦잠 자는 아이가 아녔고 일찍 일어나는 아기 새였습니다. 겉으로 보기엔 지각쟁이 같아 보였는데 속내는 혼자서 일어나 아침을 맞이했던 씩씩하고도 부지런쟁이였던 거였죠.
저 역시 아이들을 돌보다 보면 한 두 번의 경험만 가지고 아이를 '넌 이런 아이구나'라는 식의 색안경으로 바라볼 때가 많습니다. 물론 통계적 결론이 잘못되었다 할 수는 없겠지만 꼭 그런 아이라고 점찍진 말아야 할 것입니다.
점보다는 ', ' 쉼표.
이 아이는 이럴 수도 있지만 저럴 수도 있음을, 어제와는 달리 오늘은 다른 모습을 보일 수도 있음을, 지금은 이런 아이 같지만 앞으론 전혀 다른 아이가 되어 있을 수도 있음을 우리 기성세대인 어른이 먼저 인지하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어른이기 때문에 섣불리 결론짓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결론은 우리가 아닌 앞으로 살아갈 아이들이 스스로 지을 수 있도록 늘 연린 결말로 놔둬야 할 것입니다.
아이는 그저 저희와는 다른 존재임을 다 같은 아이라 할지라도 아이마다 각자의 다름이 있듯이 각자의 존재적 가치가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습니다. 그 존재적 가치를 존중해 준다는 것은 그 아이는 그 아이만의 특별함이 있고 나의 생각과 판단으로 좌지우지할 수 없음을 인정하는 태도라 생각합니다. 그 존재의 의미를 어른인 우리가 우리만의 방식대로 이끌어가지도 의미를 훼손시키지도 않아야 할 것입니다.
사람의 말이 '아' 다르고 '어' 다르듯, 우리는 한 아이를 이렇다 정의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뭐든 '아'일 거야라고 또는 '어'일 거라고도 판단해선 안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저 아이의 존재를 다 다르게 봐야 할 것입니다. 또 때에 맞게 좀 더 멀리 내다보는 여유마저 있어야겠습니다.
어른이라고 조금 더 인생을 먼저 산 선배라며, 마치 모든 걸 앞서 경험해 봤기에 너한테 해줄 수 있는 얘기라고 말하진 않아야 할 것입니다. 그저 아이는 '나'와는 다른 '너'라는 전혀 다른 존재이자 한 인간일 뿐이기에 존중받아야 마땅한 동등한 입장의 서로일 뿐이기에 우리는 아이들 앞에서 겸손히 다가가야 할 것입니다.
아이를 사랑한다는 건,
어른인 우리가 본이 되어 앞서 살아간다는 건
늘 열린 가능성을 열어두되 아이가 어떤 선택을 하는지에 따라 있는 그대로 존중해 주는 자세야말로 진정한 사랑이자 진정한 어른의 모습이 아닐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