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나이만큼이나 제 자존감도 성숙되어 그렇지 않지만, 이러한 마음을 품고 살았던 심연 속에 있었던 제 마음을 반성합니다.
여기 뜻이 전혀 다른 두 단어로 만들어진 심리학 용어가 있습니다.
schaden은 고통이란 뜻이고 freude는 환희 또는 기쁨이란 말로 남의 불행 또는 고통을 보면서 느끼는 기쁨을 일컫는 그야말로 악독한 말입니다. 도대체 이 못된 마음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인간의 심연에 자리잡은 본성이겠습니다만, 유명인사들의 말씀을 통해 그 원인이나 해결책을 찾으려 합니다.
먼저, 가수 장기하님의 노래에는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2022년 발표된 그의 노래 ‘부럽지가 않어’가 히트한 건 현재 우리 자신의 모습을 꿰뚫고 있어서가 아닐까 합니다.
삼성 창업주 부자의 샤덴프로이데관을 보겠습니다.
이병철 전 회장은 “남이 잘 됨을 축복하라. 그 축복이 메아리처럼 나를 향해 돌아온다”고 얘기했답니다.
이건희 전 회장도 “뛸 사람은 뛰어라. 걸을 사람은 걸어라. 능력이 없는 사람은 쉬어도 좋다. 단, 남의 뒷다리는 잡지 마라”고 했답니다.
혹자는, 그들은 돈이 있고 여건이 충분히 되어서 그런 말을 했을 것이라고 하겠지만, 여건이 빵빵해도 남의 잘 됨에 대한 질투심마저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2002년 월드컵에서 포르투갈은 우리나라에 0 대 1로 진 적이 있습니다.
당시 선수였고 2022년 우리나라 국가대표팀 감독이었던 파울로 벤투는 “이제 우리가 할 수 있는건 한국과 미국을 축하해주는거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2004년 유로를 준비하는 것이다”라고 인터뷰했습니다.
축구의 변방 아시아 국가에 지는 것은 정말 자존심 상하는 것이었습니다만, 벤투는 진정으로 남의 잘 됨을 축하할 줄 알았습니다.
앞에서 저는 샤덴프로이데의 마음이 없다고 했습니다만, 이 못된 놈은 탈색된 채로 제 마음 가장자리에 자리잡고 있음을 확인했습니다.
저는 보통 금요일 휴가를 사용하여 고향인 전주에서 있는 친구들과의 모임부터 각종 행사에 참석하곤 합니다.
그때마다 느끼는 것은 고속도로 상행선의 정체를 보고서 짜릿한 감정마저 느낍니다.
경계해야겠습니다.
나의 행복을 위해 남이 불행해질 필요까진 없는데 말이죠.
상대 차선이 안 밀리면 짜릿함을 덜 느끼게 될까요?
‘부러워하면 지는 거’라지요.
시기하고 질투하는 것은 자기자신의 화만 돋구게 됩니다.
여기 질투란 전혀 쓸데없는 것임을 알려주는 탈무드 경구가 있습니다.
장기하의 노래처럼 전 부럽지가 않습니다. 아니, 아예 부럽지가 않다면 왠지 싸이보그같고 그냥 부러움을 덜 느낄 뿐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되뇌일 뿐입니다.
그러고 보니 저는 부러울 때보다 부러움을 받았던 때가 더 많았습니다.
공무원으로 산 저의 삶이 그랬고, 그리고 55세를 끝으로 세 아이 모두가 사회에 진출해 있었던 점은 특히나 남들의 부러움을 많이 샀습니다.
배가 아프면 나만 손해입니다.
성공한 남을 비꼬아서 내가 얻을수 있는게 무엇일까요?
그보다는 (표정관리를 하든 어쩌든) 축하한다는 말로 상대와 함께 기쁨을 같이 나누는 것이 정신적으로 풍요롭고 마음도 가볍습니다.
또 친구도 자기에게 진심으로 축하를 건네는 나를 더욱 고맙게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들도 나의 성공에 기뻐해줄 것입니다.
남을 진심으로 축하하는 것, 그게 내게 떡이 되어 돌아올 수도 있습니다.
제 친구 중에는 그저 대면대면 하던 사이에서 저의 진심어린 축하로 시작해서부터 서로 관계가 깊어진 친구가 있습니다.
그 친구가 축하받을 일이 생겼을 때, 저의 축하에 “부러워하지 않고 이렇게 진심으로 축하해줘서 고마워”라며 별도의 향응(?)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샤덴프로이데 심리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요?
우선, 자존감을 높여야겠습니다.
자존감을 높이는 저만의 방법에 대해서는 별도의 글을 쓸 것입니다만, 아무튼 충만한 자존감으로 이를 극복하렵니다.
많은 분이 알고 있듯이 이는 고전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키팅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알려주는 것으로, 지금 살고 있는 현재 이 순간에 충실하라는 뜻의 라틴어입니다.
남과 비교해 가짜 우월감을 드러내기보다는 오롯이 현재의 자신을 기쁘게 하는 일을 찾아보아야 합니다.
샤덴프로이데의 반대말쯤 될듯한 말이 있습니다.
어느 심리학자는 “우리는 지금 샤덴프로이데의 시대를 살고 있다”라고 했습니다.
우리말로는 쌤통이라고 할까요.
샘이 난 것에 부정적인 단어를 붙인 것이겠지요.
심술통, 고집통 같은 무슨 무슨 ‘통’. 왜 그런 단어에 사로잡힙니까.
함께 즐거워 하는 것이 미트프로이데입니다.
슬픔은 나누면 반으로 되고, 기쁨은 나누면 배가 된다고 하지 않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