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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직요괴 Mar 06. 2024

견딜만한 무기력이 찾아왔다

11. 퇴사 초반과 현재 루틴의 변화

백수 3개월 차, 무기력이 왔다. 근데 왠지 견딜만한.


'무기력'이라고 하면 하루종일 누워있는 모습만 상상할 수도 있지만 난 여전히 낮 시간엔 침대에 누워있는 일이 거의 없다. 침대 근처로 가는 일이라고는 청소와 누워있는 고양이를 만지작 거릴 때뿐이다.


하는 것도 많다. 지지난주에 자격증 시험을 하나 끝냈고, 이번 주에 하나가 더 남아있다. 학과 학생회에서 운영하는 과목 스터디에도 참여하고 있고, 내일배움카드로 또 다른 국비교육도 수강 중이다.


사실 어느 날 갑자기 무기력에 퐁당 빠진 건 아니고 아주 천천히,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연스럽게 마치 게을러지듯이 무기력해짐을 느꼈다. 퇴사 초반과 요즘 루틴의 변화만 봐도 달라짐이 여지없이 드러난다.



1. 잠들고 깨는 시간이 늦어졌다

침대에 눕는 시간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으나 잠이 들기까지 시간이 더 오래 걸린다. 그렇다고 불면증은 아니고 그냥 딴짓을 굉장히 열심히 한다. 유튜브도 보고, 웹툰도 보고, 유튜브도 보고, 웹툰도 보고...  눈이 무겁게 감기고 나도 모르게 꾸벅 졸 때까지 버티다가 최종_최최종_최최최종_진짜최종의 순간이 돼서야 겨우 휴대폰을 놓고 잠든다. 


직장인 시절엔 내내 일하고 와서 겨우 생긴 자유시간이 너무 짧고, 눈 감았다 뜨면 출근해야 한다는 현실이 싫어서 그랬는데 출근도 없는 지금은 대체 뭐가 아쉽고 아까워서 잠들지 못하는지 한번 생각해 봤다. 결론은 간단했다. 

지금의 생활이 완전히 내 몸에 익었구나!


잠드는 게 아깝다기보단 언제든 자고 일어나도 상관없는 몸이라는 걸 제대로 깨달아버린 것이다. 퇴사 후 초반엔 그저 감사한 마음이 가득해서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든 알차게 사용하려는 의지가 넘쳤지만 지금은 확실히 해이해졌다고 볼 수 있다.



2. 책 읽는 시간이 줄고 영상 보는 시간이 늘었다

이북 플랫폼 서재에 읽고 싶던 책들을 잔뜩 넣어놨는데 절반도 다 못 읽은 채로 앱에 안 들어간 지 2주는 됐다. 최근 이런저런 공부를 잔뜩 하면서 교재와 문제집을 너무 많이 본 탓인지 책을 읽고 싶지 않아졌다. 당연히 핑계다. 공부 후에는 복잡하고 추상적인 즐거움보다는 단순하고 즉각적인 도파민을 얻고 싶어 하는 보상심리가 큰 것 같다. 


게다가 눈 뜨고 세수한 뒤 바로 노트북과 태블릿을 켜 공부를 하다 보니 쉬는 시간에도 자연스럽게 노트북과 태블릿으로 영상을 찾아본다. 온갖 OTT 플랫폼을 종횡무진할뿐더러, 유튜브는 영원한 내 밥친구로 자리매김 중이다.



3. 집안일을 미룬다

원래의 나라면 밥 먹고 바로 설거지 샥샥, 이불도 일어나면 먼지 떼고 털고 개고, 씻고 나면 바로 욕실 청소까지 하는 소위 말해 약간 피곤하게 사는 스타일인데 요새는 슬슬 미룬다. '좀 이따 하지 뭐' 하다가 무려 이틀 넘게 설거지 거리를 쌓아둔 적도 있다. 겨울이라 망정이지 여름이었다면... 그렇게 안 미뤘겠지!


로봇 청소기에 달린 걸레도 귀찮다고 안 빨고 버티는 바람에 온 집안에 정말 대단한 썩은내가 진동을 하는 경험을 하고야 말았다. (기계에서 자체적으로 빨고 말려주긴 하는데 그걸론 불충분해서 적어도 1주일에 한 번은 세탁기에 돌려서 빨아줘야 한다) 그 정도쯤 되니까 귀찮음보다 괴로움이 더 커서 당장 세탁해 버렸다. 

브라이언 오빠 미안해요 난 변절자야.



4. 글이 잘 안 써진다

신경 쓸 일이 많아져서 그런지 글을 쓰기 위해 숙고하는 시간이 꽤 부담스럽게 느껴진다. 그냥 가볍게 써 내려가도 괜찮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막상 노트북 앞에 앉으면 그게 안된다. 글 앞머리를 적다가도 얼마 안돼 무슨 말을 써야 할지 갑자기 탁 막혀버려 결국 임시저장 상태로 화면을 나온다. 지금 이 글도 한 번의 임시저장을 거쳐 마무리되었다. (여기에 살짝 변명을 덧붙이자면 지난 주말에 무언가 잘못 먹는 바람에 위장염에 제대로 걸려 오늘까지도 고생 중이다. 이번 주 월요일 연재일은 꼭 지키고 싶었는데)



막상 이렇게 적고 나니까 별 거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래서 애초에 견딜만한 무기력함이라고 말하기도 했지만. 분명 의욕도 떨어지고, 잠도 많이 오고, 할 일도 자꾸 미루게 되고... 그런데 그게 또 심각한 정도는 아니다. 이럴 걸 어느 정도 예상하고 강제로라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어둔 덕분인지 나름 많은 것들을 하며 살고 있다. 


AI가 이런 내 생활을 어떻게 알고 저격하는 건지 이상하게 유튜브 알고리즘에 '갓생 직장인', '직장인 미라클 모닝', '명문대생/의대생/로스쿨 학생 루틴 어쩌고' 등등 이런 영상이 계속 뜬다. 물론 내가 몇 번쯤 클릭해서 봤으니 그렇겠지. 썸네일만 봐도 기가 팍 죽어버리는 바람에 순간적으로 나의 처지를 비교하며 셀프 비관한 적도 많다. 솔직히 굉장히 부럽긴 하다. 그 부지런함이, 꾸준함이, 그리고 거기서 수없이 파생되는 훌륭한 결과물들이. 근데 난 도저히 그렇게 못할 것 같다는 좌절감에 인생에 대한 회의도 함께 스쳐 지나간다.


한참을 그렇게 부러움과 좌절 사이를 줄타기하다 보면 그 생각에 빠져 정작 내 눈앞에 해야 할 것들을 놓치고 만다. 그런 상황을 여러 번 반복하다 보니 깨달은 바가 있다.


이 순간 내가 해야 할 아마도, '역시 난 또 이러네', '한심하다' 이런 생각 따윈 버려두고 그저 지금 내가 할 수 있는(혹은 강제로 해야만 하는...!) 것들이라도 묵묵히 해나가면서 시간을 견디는 것이다. 경칩도 지났으니 곧 봄이 오고 날이 따뜻해지면 마음이 간질거리면서 의욕이 조금 다시 올라올 수도 있고 뭐, 사람이 원래 좀 왔다 갔다 하지 않는가. 기다리다 보면 내 마음의 요동이 가라앉는 때가 올 것이라 믿는다.


혹시라도 퇴사 후 변해가는 자신의 생활 패턴에 스스로 실망하고 있는 분이 있다면, 대부분의 남들도 다 그렇다는 것. 이상한 게 아니라는 것. 그리고 그 순간을 견디고 극복하는 것 역시 나 스스로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오늘 종일 먹은 설거지를 아직까지도 쌓아둔 내가 11시에 끝난 스터디 후에도 의지를 다잡고 이렇게 글을 쓰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 결심했어. 이 글 발행하고 나면 설거지해야지.



사진: UnsplashEphraim Mayre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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