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직요괴 Feb 15. 2024

명절에 퇴사 소문내기

10. 좋은 소식은 좋은 날에 알려야지

지난주, 퇴사 후 첫 명절을 맞았다. 

모름지기 백수에게 명절이란 나갈 돈은 많은데 자랑할 건 없는, 그렇기에 더욱더 본능적으로 피하고 싶은 그런 날일지도 모른다. 


퇴사 소식은 주변에 많이 알리지 않았다. 누군가 요즘 회사 생활은 어떻냐 물어보거든 넌지시 말해주는 정도였다. 여러 일정으로 바쁘기도 했고, 나이가 들수록 누군가에게 일상을 미주알고주알 이야기하는 게 점점 더 어색하게 느껴지기 때문도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명절에는 혼자만의 미션을 설정해 두었다.


미션명: '아직 나의 퇴사를 모르는 가족들에게 소식을 알리자!' 


특히나 그동안 말할 기회가 없었던 시댁 식구들(그렇다. 놀랍게도 기혼이다.)에게 알리는 게 목표였다. 거창한 이슈까진 아니지만 그래도 자잘한 생활의 변화가 있으니 설이라는 좋은 날(?)을 맞아 직접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렇다고 또 각 잡고 할 만한 말은 아닌 것 같아 그냥 이런저런 대화 중 관련 주제가 나오면 자연스럽게 말하자 정도로만 생각해 둔 채로 시댁으로 출발했다.


평소 주변 사람들 얘기를 들어보면 다들 회사에 그만두겠다고 말하는 것만 해도 엄청 힘들어하던데 난 여러 번의 퇴사 경력 덕분인지 어느 순간부터는 사직서를 쓰는 일도, 주변에 소식을 알리는 일도 크게 어렵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엔 왠지 모르게 꽤 긴장한 상태였다. 아직 나에 대해 많은 부분을 알지 못할 새로운 가족들에게 실망감을 안길까 두려워서였을까?


평소와 다를 것 없는 명절 분위기, 각자 생활이 바빠 평소엔 얼굴 한번 보기도 어려운 식구들이 오랜만에 마주 보고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그 와중에도 나는 대화의 흐름 속에서 미션을 수행할 적절한 타이밍을 끊임없이 노린다. 그때, 누군가 나에게 얼굴이 좋아졌다는 칭찬을 건넨다. 그래 바로 지금이다!


얼굴이 좋아 보여요? 와 역시 티가 나나 보네! 사실 얼마 전에 퇴사하고 지금 공부하면서 잠깐 쉬고 있거든요.



말이 끝나고 대답이 돌아오기까지의 그 찰나가 매우 길게 느껴졌다. 티 내지 않으려 했지만 어떤 반응일지 살피느라 눈이 데구루루 굴러갔다. 그러나 작은 염려조차 불필요했을 만큼 가족들의 반응은 '쉬어서 좋겠다', '부럽다', '잘했다'와 같은 응원과 격려로 온통 가득했다. 


물론 퇴사란 온전히 나의 결정이고 책임이기에 누군가 왈가왈부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가족이라는 공동체로 묶여있기에 각자의 신변에 변화가 생긴다면 서로에게 조금이라도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아마 나의 염려와 긴장은 그런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었을 테다. 


가족들의 반응은 마치 중요한 시험에 통과한 기분까지 들게 했다. 잠시나마 들었던 뭔지 모를 불편한 마음이 싹 씻겨 내려가는 느낌에 괜히 어깨까지 당당해졌다. 남의 말을 잘 흘려듣지 못하는 편인지라 누군가는 가볍게 던졌을 걱정의 한마디조차 내겐 오랫동안 죄책감처럼 남았을지도 모른다.


미션 성공과 함께 배도 마음도 주머니도 두둑한(이 나이에 세뱃돈을 받았다 얏호) 행복한 백수의 명절이었다.





사진: UnsplashVitolda Klein


이전 10화 퇴사하면 감기도 안 걸릴 줄 알았는데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