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보다는 자유가 지향하는 가치로서 적합하다
앞의 글에서 행복을 최대화하는 것을 삶의 목적으로 삼는 것의 불리한 점들에 대해 말했다. 그렇다면, 그 대안이 될 만한 지향은 무엇일까? 자유는 유력한 후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자유라는 단어는 상당히 다양한 의미를 포괄하고 있으며, 때로는 서로 상반되는 의미들로 해석되기도 한다. 이 다양한 의미들에 대해 되짚어 보는 일에서 이야기를 시작해 보자.
먼저 효용 최대화를 최상의 가치로 삼는 경제학적 사고방식에서는 자유의 가치를 폄하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 방식을 두 가지로 구분해 볼 수 있다.
먼저, 경제학적 관점에서 자유란 ‘선택의 자유’이며, 그 가치는 자유로운 상태에서 선택할 수 있는 최상의 대안이 가져다 주는 효용과 자유의 제한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선택할 수밖에 없는 대안의 효용 사이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식당에서 제한 없이 메뉴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는 직장 상사와 함께 식당에 가서 어쩔 수 없이 선택해야 하는 메뉴와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메뉴가 줄 수 있는 효용 차이만큼의 가치를 지닌다.
다른 한편으로, 자유는 그 자체로 효용의 한 유형일 수 있다. 휴일에 느끼는 여유로운 기분, 자유롭게 뭐든 할 수 있다는 느낌은 그 자유를 갖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와 무관하게 그 자체로 큰 행복일 수 있다.
이 두 가지 관점은 하나는 자유를 행복의 한 하위 수단으로 여긴다는 점에서, 다른 하나는 다양한 행복의 유형 중 한 가지에 불과하다고 여긴다는 점에서, 행복(효용)에 비해 자유의 가치가 크지 않다고 평가한다.
한편, 자유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자유지상주의적 관점이 있지만, 현대 사회에서 자유지상주의란 보통 정부의 규제에 반대하여 시장과 민간 기업의 자유를 강조하는 입장으로 이해된다. 이런 관점에서 보는 자유는 시장의 자연적 질서를 제외하고 정부 등 인위적 권력에 의한 강제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많은 경우 자유라는 개념은 이처럼 외부의 강제가 없는 상태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하지만, 어디까지를 외부의 강제로 볼 것인가의 문제가 있다.
우선, 물리적/법적 강제력이 아니더라도, 사회에 통용되는 윤리적 기준이나 관습, 문화, 평판의 기준 등은 개인의 선택을 제한하는 요소로 작용한다. 심지어 이와 같은 문화적 강제력은 학습과 경험을 통해 사람의 마음 속에 내재화되기도 한다.
또한 어떤 경우에는 내면의 충동이나 습관이나 고정관념 등을 자유의 반대개념으로 보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충동으로부터의 자유, 고정관념으로부터의 자유 같은 표현들도 어색하지가 않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자유를 구속하는 요소들을 외부에서 뿐 아니라 인간의 내부로까지 확대하여 찾기 시작하면, 과연 인간에게 순수한 의미로서 자유가 가능한 것일까? 우리의 선택을 좌우하는 의지는 평소의 믿음이나 습관, 충동과 욕구 등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지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출현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방식으로 우리는 결정론과 자유의지의 역설에 다시 빠져들게 된다.
한편으로 우리가 완벽하게 자유롭다면, 우리는 무엇을 근거로 선택을 내릴 수 있겠는가? 우리의 선택을 결정짓는 제반 요소들로부터 온전히 자유롭게 되면, 역설적으로 우리는 어떤 것도 선택할 근거를 갖지 못하게 될 것이다. 이런 경우 자유는 두 여물 더미 중 하나를 선택하지 못하고 그 가운데에서 굶주리는 뷔르당의 당나귀에게 그랬던 것처럼 오히려 축복이 아니라 저주가 된다.
흔히 필연과 자유는 모순된 개념으로 여겨지지만, 갈등과 혼란 없이 내면의 필연에 따라 선택하고 행동하는 상태가 자유의 이상적인 모습일 수 있다. 스피노자 같은 이들이 필연에 따르는 것이 곧 자유라고 하는 것은 이와 같은 맥락에서일 것이다. 아마 우리가 완전한 이성을 가졌다면, 우리는 어떤 것이 최선의 선택인지 알 수 있을 것이고, 그와 같은 최선의 선택에 따라 사는 삶은 필연과 자유가 합치되는 삶일 것이다.
하지만 물론 우리는 그런 이상적 삶을 살 수 없다. 우리의 이성적 역량이 부족하고, 최선의 선택이 무엇인지 알기에는 정보와 지식이 형편 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본질적으로 무엇이 최선인지를 평가할 수 있는 근본적 가치 기준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혼란이 가중된다. 그럼에도 우리는 최선의 선택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좋은 선택을 해야 한다는 압박을 느낀다. 우리에게는 최선의 선택을 해야 할 책임이 주어져 있다고 느낀다. 이런 압박감은 매우 괴로운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자유로부터의 도피를 꿈꾸기도 한다. 우리의 선택을 지시해 줄 명확한 기준, 심지어는 외부로부터의 구속까지 바라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처럼 자유는 우리가 두려워하고 싫어하는 대상인 동시에, 우리가 예찬하고 기뻐하는 대상이기도 하다. 우리가 주말이나 긴 휴가를 앞두고 느끼는 자유의 기쁨은 그 자유를 통해 실제로 하게 될 경험들에 대한 희망으로 다 설명되지 않는다. 미리 다 알 수 없는 새로운 가능성의 설렘, 자유롭게 어디로든 갈 수 있다는 그 해방감 자체가 기쁨과 도취감을 주는 것이다. 영화 ‘내일을 향해 쏴라’의 주제곡처럼 우리에게 연속되는 불운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라 하더라도 “우리는 자유롭기 때문에 걱정하지 않는다”. 우리는 무법자와 방랑자와 항해자들을 동경한다.
우리는 외부의 구속으로부터의 자유 뿐 아니라 내적인 구속으로부터의 자유까지 꿈꾼다. 하지만 내적인 구속이란 무엇일까? 충동과 욕구일까, 아니면 그런 충동과 욕구를 따르는 것을 가로막는 자기 검열일까, 실행을 망설이게 만드는 의심일까, 잘못된 행동을 반복하게 만드는 습관과 고정관념일까? 우리는 자유를 원하지만 무엇으로부터의 자유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도가 사상과 불교에서는 각자의 방식으로 자유의 이상을 제시한다. 도가 사상에서는 층층이 쌓인 두터운 바람을 바탕으로 거칠 것 없이 날아가는 거대한 붕새, 상갓집에서 노래를 부르는 기인, 세상에 어떻게 쓰일지를 아랑곳하지 않고 유유자적하게 생을 누리는 큰 나무 등 다양한 일화와 이미지들로 자유로운 존재들을 묘사한다. 도인은 예의범절이나 평판이나 세속의 성공을 위해 요구되는 책임이나 아름답고 선함의 우열에 대한 가치 기준에 연연하지 않고 자유롭게 소요한다. 불교에서는 탐욕과 어리석음과 아집을 벗어난 해탈을 강조한다.
반면, 자유지상주의자들이나 실존주의자들은 책임의 근거로서의 자유를 강조한다. 자유가 중요한 것은, 책임의 주체가 되기 위해서이다. 구속은 책임을 면해 주지만 자유는 책임을 떠안도록 만들고, 자유를 누림과 더불어 그에 따르는 책임을 감수함으로써 개인은 존엄성을 얻는다.
이처럼 자유의 개념은 복합적이고 다양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자유를 추구해야 하는가?
우선 나는 경제학적 관점에 자유의 가치가 제한되는 것에 반대한다. 자유는 그 자체로서 기쁨을 주는 가치이며, 더 나은 선택을 위한 도구에 머물지 않는다. 또한 앞의 글에서 행복의 개념이 서로 비교가 불가능한 여러 가치를 하나의 기준으로 통합하려는 것에서 문제가 있다고 논한 것처럼, 자유의 가치는 행복의 한 요소가 아니라 다른 유형의 행복과 독립된 가치를 가진 것으로 존중을 받아야 한다. 자유가 주는 해방감과 기쁨과 설렘은 다른 종류의 가치들에 종속되지 않는 고유의 가치를 가진다.
하지만 자유가 구속으로부터 벗어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이 어떤 구속이냐에 따라 무척 다른 종류의 자유가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외적, 내적 구속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상황을 이상적으로 여길 수는 없다. 외적인 제약이 없다면 우리는 극복할 대상을 갖지 못할 것이고, 우리 안에 있는 다양한 요소의 힘들이 우리를 어떤 방향으로 끌고 가지 않는다면 우리는 선택과 실행의 동력을 갖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자유를 느끼는 상태와 그렇지 않은 상태를 구분하는 차이들이 있다. 우리 내부의 요소들이 서로 갈등을 일으키면서 어떤 선택도 내리지 못하거나, 의심하고 머뭇거리면서 행동을 하거나, 스스로를 부끄럽고 떳떳하지 못하다고 여기거나, 얼마 가지 않아 후회하게 될 행동을 격정 속에 하게 되는 경우 우리는 자유롭지 못하다. 반면, 자신의 이성과 직관이 조화를 이룰 때, 마음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이 행할 때, 특정 대상을 바라보면서 자기 자신을 잊을 때, 불안과 두려움 없이 현재에 몰입할 때 우리는 자유를 느끼거나 구속을 잊는다.
도가나 불교의 가르침처럼 세속에서 해탈한 자유도 있겠지만, 나는 그 범위를 더 넓혀 보고자 한다. 미래에 이루고자 하는 어떤 목표이든, 어릴 때부터 받은 교육과 경험에 의해 꾸준히 형성된 믿음이든, 의구심이 들지 않거나 혹시 일어나는 의구심이 있더라도 잊고 몰입하기로 마음 먹은 어떤 결심이든, 이것이 옳다는 확신이 함께 하는 자연스러운 행동이든, 어떤 중심이 되는 요소를 축으로 삼아 분열되지 않은 하나의 마음을 갖는 것. 자신의 내면에서 갈등이 일어나지 않거나 갈등이 어떻게든 해소된 상태의 통합된 마음. 그것이 자유를 정의하는 한 방법이 아닐까? 얽매임 없이 자유롭게 사는 도인들과 달리 세속에 얽매인 우리는 사회적 지위나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다른 목표를 이루고자, 또는 그에 따른 책임을 다하고자, 또는 선함과 올바름에 대한 우리의 믿음에 충실하고자 스스로를 규제한다. 하지만 그러한 규제를 부과하고 받아들이는 마음을 하나로 모음으로써 우리는 자유에 가까워질 수 있다.
이러한 자유를 위해서는 단기적 접근과 장기적 접근이 필요하다.
단기적 접근은 자신의 마음을 어지럽히는 번잡한 생각들을 과감히 떨쳐 내고 현재에 집중하는 것이고, 또한 선택 앞에서 망설임과 불안 대신 평안한 마음을 갖는 것이다. 이를 위해 중심이 되어야 하는 것은 직관이다. 이때 말하는 직관이란, 자신의 믿음, 정보, 생각이 반영된 종합적인 마음의 대변자를 뜻한다. 우리가 자신의 마음을 살펴 보고, 갖고 있는 정보들과 생각을 정리하는 등의 과정을 통해 우리의 직관은 개선된다. 하지만 그것은 지금 내가 갖고 있는 고정관념과 두려움과 부족한 식견의 소산일 수밖에 없다. 우리가 가진 한계에 기반하여 형성되는 부정확한 직관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직관의 불완전성을 감수하면서 어린 새가 둥지에서 날아오르듯 그 불완전한 직관에 스스로를 맡기는 습관을 가져야 한다.
사소한 선택은 다른 노력을 거의 기울이지 않고 자연스러운 직관에 의존할 수 있다. 더 중요하면서 긴박하지 않은 선택의 경우엔 시간을 두고 관련된 정보를 수집하거나 깊이 생각을 하거나 조언을 구하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직관을 개선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일 수 있다. 하지만 그 사소함과 중요함에 대한 판단, 직관의 개선을 위해 노력을 어느 정도 기울여야 할지에 대한 최초의 판단 역시 직관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확신을 갖기에 충분하지 않은 상황에서도 자신의 직관을 믿는 용기와 습관을 갖는 일에서 시작을 해야 한다.
자유를 위한 장기적 접근은 수양을 하고 역량을 키우는 것이다. 마음을 현재에서 멀어지게 하고 불안과 걱정에 잠기게 하는 생각들을 이어가지 않는 것, 타인과 자신을 존중하는 마음을 지키고 폄하하는 목소리에 틈을 주지 않는 것, 앞에서 말한 것처럼 현재의 자기 자신이 총체적으로 반영된 직관에 스스로를 맡기는 것, 자기 자신보다 바라보는 대상에 집중하는 것, 이러한 습관들을 만들고 키워나가는 것들이 수양의 방법들이다. 또한 자신의 믿음들을 검토하면서 신뢰성과 일관성을 높여 나가는 것, 자신을 경직되게 만드는 고정관념들을 인식하는 것, 마음이 움직이는 방식들을 이해하는 것,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최선의 직관을 구성하는 방식을 익히는 것은 지유의 기반이 되는 역량을 키우는 방법들이다.
우리는 사정에 맞게 장기적 접근에 자원을 할당할 수 있지만, 자유를 향한 단기적 접근은 지금 이 순간의 마음에 의존한다. 어떤 사람들이 비난하거나, 혹시 미래의 내가 돌아보면서 잘못된 판단이라 여길 수 있어도, 지금 이 순간의 판단을 믿고 자신을 맡기는 것이 자유의 첫걸음이다.
지금 자유롭기로 마음 먹는 것을 통해 우리는 자유의 기반을 얻는다. 그 기반 위에서 우리는 내부와 외부에서 가해지는 제약들에 대응하는 역량을 키우고 발휘하면서 자유와 힘에 대한 경험의 범위를 확대해 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