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은희는 나에게 또래라고 했으나, 나보다 두 살이 많았다. 마흔둘이다. 전지수는 그녀보다 네 살이 더 많다. 마흔여섯이다. 그녀들은 남편이 있고, 그 외 조력자 남자도 곁들여 있는 것처럼 보인다. 거래에 능숙한 여자들이다. 부부 사이에도 거래가 성립되는 게 정상적인 건데, 하물며 애인 사이에 거래가 없다는 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다. 인간의 결혼 제도는 "거래"로부터 발생했다.
거래에는 반드시 대가가 따른다. 호의적인 마음에서 비롯되는 거래 역시 대가는 있다. 대가란 물리적이거나 가시적인 요소로만 구성되는 건 아니다. 보이지 않는 정신적 채무 의식과 의존성은 무의식 속에 저장되고, 인간의 의지에 영향을 끼치게 된다. 그리고 어느새 그들을 안일함과 나태 속으로 침몰하도록 만든다. 사활을 건 극단의 위태로움과 절박함이 그들에게는 존재할 수가 없다.
남편이나 애인은 그녀들의 외부 요소에 불과하다. 그녀들을 규정하는 건 그녀 자신이어야 한다. 외부 요소가 많을수록 정체성이 혼탁해지기 마련이다. 피를 흘리며 기어서라도 혼자서 반드시 길을 가야 하는 자의 숙명적 의지를 가진 권현을, 저들이 감히 이길 수 없는 까닭이다. 나는 성은희와 전지수에게는 없는 '불굴의 혼'을 권현에게서 읽었다. 위대하고 끝없이 창백했다. 뜨거움이 극에 달하면 맑게 차가워진다.
순수한 광기를 지닌 김도훈과 불굴의 혼을 지닌 권현을 나는 흠모한다. 생물학적 본성으로부터 끝없이 영혼으로 진화하려는 정일우의 내적 투쟁과 의지를 나는 지지한다.
구월도 하순에 이르렀다. 프리테오스 조우진이 호출한다. 프리테오스 고객 모임 프로젝트의 행사를 논의하자고 요청했다.
"이기자님, 가을이에요~ 고객님들만 따로 모시고 재즈 파티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요?"
"재즈 파티요? 후훗~ 대표님, 재즈파티 또 하고 싶으세요? 쳇 베이커의 쿨 재즈 말고 차라리 스윙 재즈로 경쾌하게 가신다면 모를까요~"
두뇌가 명석한 조우진은 나의 말을 금세 알아듣는다.
"이번엔 성작가님은 초대하지 않을 생각이에요~ 이기자님, 그때 불편했어요?"
"아니요, 불편하긴요. 프로젝트에선 고객님들이 주인공이 되는 기획인데, 혹시나 역할이 뒤바뀌는 건 아닐까 걱정이 돼서요."
나는 일의 크기와 상관없이 내가 맡은 일에 매우 충성하는 편이다. 그게 나의 이익과 아무 상관이 없어도, 그 일의 목표 지점에 도달하는 데서 오는 쾌감을 즐긴다. 이번 프로젝트는 프리테오스를 대중에게 알리고, 확고한 지지자들을 구축하는 게 목적이다.
프리테오스에 현재 리스트업 되어 있는 주요 고객들은 지역 내 부유한 여성들이다. 모델 같은 조우진의 인물에 반해서 온 사모님들이 대부분이지만, 기본적으로 예술적 소양을 추구하는 면면을 가지고 있다. 병원장 사모이면서 도의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김경희가 이 모임의 핵심이다. 나는 기획자이지만, 그녀에겐 친숙하고 편안한 직원 정도의 의미다.
김경희는 나이가 오십 대 중반이다. 그런데도 여전히 외모는 여성스러움을 유지하고 있다. 정일우는 그녀의 얼굴 사진을 찍은 후, 화장실로 달려갔었다. 사진 찍어달라고 찾아온 고객을 거절할 수도 없었던 정일우에겐, 그만의 직업적인 애환도 있었다. 정일우는 탐욕스러운 눈빛을 극도로 혐오한다.
조우진은 김경희를 매우 신중하게 대한다. 조우진은 사업상의 파트너들 앞에서도 늘 당당하고 주도적인 사람이다. 그런데 김경희 앞에서는 꽁지를 내리고 머리를 수그린다. 김경희의 남편이 동문 선배라서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았다.
김경희는 보수당의 도의원이다. 조우진이 김경희 이름을 거론했을 때, 나는 순간적으로 화이트 빌더의 장연정을 데려와야겠다고 생각했다. 화이트 빌더는 치과병원으로 시작해서 문화센터까지 복합적으로 설계된 공간이다. 장연정은 그 센터의 원장 사모다. 진보적인 성향이다. 오십 대 초반이다.
김경희와 장연정을 주축으로 한 프리테오스 고객 모임은 월마다 진행하기로 했다. 첫 행사를 다음 달 시월 첫째 주 금요일 오후, 프리테오스에서 갖기로 했다.
"이기자님, 같이 저녁 식사하고 가세요~"
시계를 보니, 오후 여섯 시가 되어간다. 다른 약속이 있다고 둘러댈까 순간 내 마음이 갈등을 한다. 그가 재빠르게 내 심리를 파악하고, 서둘러 상의를 걸쳐 입는다. 그가 벌써 내 팔을 잡아 이끌고 있었다.
그가 운전하는 차에 타고 그가 사는 동네 근처 식당으로 왔다. 그가 자주 다니는 단골 밥집이라고 했다. 그가 식탁 의자에 철퍼덕 앉으며, 상의를 벗어 의자 위에 걸었다. 둘이 식사하는 건 처음이었다. 그와 함께 하는 식사 자리에는 늘 아티스트들과 감독들이 있었다.
"이모님, 여기 소주 하나 주세요~"
조우진이 밑반찬이 깔려있는 식탁 위에서 소주병의 뚜껑을 땄다. 그가 직접 따라서 잔 하나를 내게 건넸다. 밥도 나오지 않았는데, 밑반찬부터 안주 삼아 먹는다.
"이기자님이랑 둘이서 식사는 처음이죠? 늘 다른 사람들이 있었어요. 저는 늘 긴장해 있었고요~"
그가 편안한 웃음을 지어 보이며 소주잔을 들이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