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원이 따라주는 차를 마시고 있을 때, 김도훈이 돌아왔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재원씨 차맛이 선생님 차맛 따라가려면 아직도 멀었네요. 선생님 언제 오시나 기다리던 중이에요~"
김도훈이 갈피를 못 잡는 어설픈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 앉았다.
"진영씨, 나 어때 보여요?"
"선생님이야 늘 청년 같죠~"
평소 같으면 이런 하찮은 너스레에도 섬세한 미소를 지어 보이던 그였다. 김도훈은 어린아이의 얼굴이 있는 사람이다. 김도훈이 말없이 차만 따르다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나 여자를 한 명 만났어요. 나는 그 사람을 좋아하는데, 그 사람은 그렇지가 않은가 봐요."
"만났다 하심은... 그런데 왜 그 사람은 그렇지가 않은가 보다고 생각을 하세요?"
"내가 진영씨 특별하게 여기는 마음 가지고 있던 거 알고 있었지요? 지금 그걸 따지려는 게 아닌데... 그 사람한테 왜 배신감이 드는 건지 나도 모르겠어요. 여자는 상대를 좋아해야 같이 자고 싶은 거 아닌가요?"
김도훈은 순수한 광기만 있는 게 아니었다. 순수한 백치미까지 가지고 있었다. 일반화의 오류가 가장 무서운 법이다. 시대가 바뀌기 전부터 그랬다. 세상이 어떻게 변해가는지도 모르는 채, 김도훈이 있는 공간은 늘 세상과 멀게만 느껴지곤 했다. 주인에게 버려진 초라한 개처럼 남루해진 김도훈을 향해, 나는 뭘 모르는 오빠를 가르치듯 그를 바라보았다.
"여자가 다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요? 포식자 같은 여자도 있고, 한순간의 쾌락을 위해 상대를 도구로 사용하는 여자도 있어요. 발정 난 것도 아닌데 발정 난 암캐처럼 연기하는 여자도 있구요. 여자가 남자보다 더 교활할 수도 있어요. 자신의 이익과 목적을 위해 움직일 때는요."
"나 성은희 작가랑 잤어요."
억울한 일을 당하고 와서 누나한테 일러바치듯이 김도훈이 기운 없는 표정으로 말했다. 난데없는 김도훈의 고백에 오히려 얼굴이 붉어진 쪽은 나였다. 지난겨울, 방학이라 괜찮다며 머리를 금빛으로 물들이고 나타났던 김도훈의 고등학생 딸의 얼굴이 불현듯 스치며 지나간다.
그래도 이만하길 다행이다. 걱정했던 것보다, 김도훈은 사태를 빨리 파악한 듯 보인다. 내 앞에서 고백성사라도 보는 것처럼, 순순히 자백하며 억울하다고 호소하는 편이 나았다. 가련한 생각마저 들었다.
"유월 달에 구스토 오픈 파티에서 처음 만났던 거죠? 성은희 작가요."
"그날 그녀가 모자 잃어버렸다고 무대에 올라갔다가 내려와서, 담배를 같이 피울 때 처음 제대로 그녀의 얼굴을 봤어요."
그렇다면, 당연히 김도훈은 모자 도둑이 아니다. 성은희는 김도훈의 상대가 될 수 없다. 김도훈의 숭배의 대상은 어쩌면 영원히 나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내가 열정의 대상을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르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김도훈에게서 끊임없이 갈증하는 나를 보았다. 사랑이라는 이데아를 찾는 슬픈 인간의 운명이 그에게도 드리워있었다.
그가 순수한 광기 그 자체일 수 있는 건 그가 본능적으로 예술가로 타고난 탓이다. 그는 작품에 대한 구상이나 계획 같은 것을 잘할 줄 모른다. 붓질 하나로 즉각적으로 그가 보는 세상을 표현한다. 열정이 차올라 끝내 광기처럼 되어버렸다.
혼자 비밀스러울수록 광기는 더 커진다. 김도훈의 광기 같은 열정이 더 이상 고통의 언덕에 솟아있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어차피 사랑의 안식처 같은 건 없는지도 모른다. 최재원이 가마에 불을 때기 시작했다.
공방을 나서며, 가까이에 있는 구스토로 향했다. 토요일 오후라서 관람객들이 제법 보였다. 구관장이 느닷없는 나의 방문이 더 놀랍고 재밌다는 반응을 보이며 환대한다. 구스토 오픈 행사 끝나고 여름 방학에 뉴욕에 다녀왔다고 자랑을 한다. 구스토가 뉴욕에 있는 아트센터랑 협업할 거 같다는 소식이었다. 구교수는 참 재주 있는 사람이다. 게다가 구교수보다 열다섯은 젊은 김도훈과는 반대로, 늘 시끌벅적한 세상의 한가운데 우뚝 서있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