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현은 레즈비언이다. 이 사실을 아는 건 그녀의 애인과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뿐이다. 우리 세 사람은 사람들이 성소수자를 떠올릴 때 갖는 선입견을 불편하게 여긴다. 우리에게 중요한 건, 그 무엇도 아닌 오직 사랑이라는 가치 하나뿐이다. 그래서 정일우와 권현과 나는 친구가 될 수 있었다. 사랑을 단지 생물학적 관점에서가 아니라 신화적 관점에서 바라보도록, 태생적으로 운명을 타고난 사람들이다.
권현이 정일우에게 말했다.
"우리 지역에 아주 재밌는 작가가 한 명 등장했어요. 정선생님은 아직 못 만나보셨죠?"
누드사진을 찍는 정일우는 영혼이 몸을 지배한다고 주장하는 입장이다. 기독교 신학 서적도 두 권 썼다. 그는 재밌는 사람보다 멋있는 사람을 좋아한다.
"권선생이 재밌는 작가라고 표현한 걸 보면, 재밌긴 한가 보네요. 세상에 재밌는 사람이 어디 한둘이어야 말이죠."
정일우의 말은, 관심이 그다지 가지 않는다는 완곡한 표현일 뿐이다. 아름다운 몸을 가진 여자들을 어디 한두 번 보았겠는가. 게다가 그 눈빛이 공허하거나 탐욕스러운 자국이라도 보이면, 정일우는 배멀미하듯 금세 싫은 내색이 역력해지곤 했다.
"권선생님도 지난번 구스토에서 성작가님 처음 본 건가요?"
"응, 나도 그날 처음 봤어. 구관장님 눈에 발탁된 걸 보면, 이슈가 되는 작가인 건 분명해~ 작품성과 상관없이 말이야."
"그럼 그날 성작가님 모자 없어졌다고 마이크 잡고 방송할 때 기억나시겠네요~"
"그게 나도 궁금하던 참이야, 그때는 술주정도 참 희한하게 한다 생각했거든. 그런데 지난주에 프리테오스에서 봐봐~ 미치지 않고서야, 사람들 앞에서 똑같은 장난을 칠 리도 없고. 참 알 수가 없는 여자야~ 정말 누가 가져간 거라면, 누군지 몹시 궁금하기도 하고."
권현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 권현은 범인 선상에서 제외하기로 한다. 동기가 충분하다 해도, 권현의 성품은 복수조차 시간 낭비로 볼 사람이다. 그 시간에 사랑을 하고 그림을 한 장 더 그리며, 자기만의 행복을 쟁취하는 걸 승리로 여길 사람이다.
권현의 작업실이 있는 낡은 아파트 주차장에 차를 세워놓고 택시를 탔다. 터널 한 개를 통과하는데, 또 심장에 불꽃이 일렁인다. 터널 안의 붉은색 조명이 양쪽에서 세로로 휘어지듯 두 개의 선을 그리며 불타오른다.
다음 날은 토요일이었다. 주말에도 공방에서 작업하고 있을 김도훈을 찾아갔다. 김도훈은 설날과 추석 이틀만 빼고 거의 공방에 나와있는 편이다. 가끔 혼자서 인도로 여행을 갈 때를 빼고는 늘 그러했다. 빵을 간식으로 사들고 작업실로 갔다. 최재원만 혼자 있었다.
"안녕하세요, 재원씨~ 지나는 길에 차 한잔 보시받으려고 왔어요. 선생님은 안 계신가 봐요~"
"선생님 요즘 사랑에 빠지셨는지, 좀처럼 작업에 집중을 못하세요. 작업실도 자주 비우시고요."
김도훈은 아내와 한 집에는 살고 있지만, 남남처럼 지낸다는 소문이었다. 생활비는 꼬박꼬박 빠트리지 않고 충분히 챙기는 가장이다. 그러나 그의 혼 역시, 사랑만 찾으면 어디론가 훌쩍 떠나버리고도 남을 혼이다. 이성과 광기가 있다면, 김도훈은 광기에 가까운 인물이다. 지금껏 그가 이성적으로 작품 활동하며 살 수 있었던 건, 그의 광기를 잠 깨워줄 운명적인 여자를 못 만난 탓이었다.
위험하다. 그는 성은희를 그런 대상으로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사랑의 신화적 요소를 믿는 족속들은 성은희라는 여자의 정체를 파악하는 게 어렵지가 않다. 하지만 김도훈은 생물학적 요소를 좇는 난봉꾼도, 신화적 요소를 좇는 이성주의자도 아니다. 순수한 광기 그 자체다. 그것이 그의 예술에 표현될 때는 아름답고 신묘하다. 그러나 그가 지금 사랑이라고 믿는 것은, 그리 멀지 않아 상처와 분노, 회한뿐일 게 뻔했다.
김도훈이 찾는 건 숭배의 대상이다. 그의 광기를 다 쏟아붓고, 영원히 그의 광기를 한 사람 안에 가두어버릴 수 있는 숭배의 대상을 원했다. 한때 그의 눈빛이 나를 좇아 움직였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의 숭배의 대상이 되기엔 지나치게 탐구적이다.
그의 광기가 숨어 있는 눈빛으로부터 나는 도망치지도, 그걸 재밌어하지도 않았다.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보여주고 그 자리에 계속 있었다. 나는 그의 작가로서의 순수한 광기를 흠모했다. 오래지 않아 그는 거품을 걷어내듯, 그가 내게 던진 시선을 거두어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