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모자 도둑 19

by 도라지

프리테오스에서 권현의 전시회가 오픈되는 날이었다. 아침에 출근하려는데 차가 말썽이다. 하늘도 심상치가 않았다. 아직 십일월인데 눈이라도 내릴 것 같다. 택시를 타고 신문사로 출근을 했다. 편집장이 애인과 문제라도 생긴 건지 기압골이 스산했다. 벌써 양미간이 수상쩍다.


하지만 나는 눈치 보지 않는다.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예전에는 나 역시 '또라이'였고, 지난주부터 프리테오스 조우진은 우리 신문사 사외 이사로 참여하게 되었다. 조우진은 편집장을 조용히 따로 부른 적이 있었다. 편집장은 조우진보다 아홉 살이 더 많다. 그 주부터 편집장이 나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 차라리 편집장에게 또라이 소리를 듣는 편이 좋았다. 이제 거꾸로 편집장이 내 눈치를 살핀다.


오후가 되자, 편집장의 찌푸린 양미간 같은 하늘에서 정말 눈이 날리기 시작했다. 택시를 타고 프리테오스로 향했다. 저만치 프리테오스가 보이는 길가에서 택시를 세웠다. 편의점에 들어가 온장고에서 커피 하나를 꺼내서 마셨다. 사람들이 많은 자리에서 예전처럼 조우진을 대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된다.


전시회 오픈은 늘 파티 성격을 띤다. 하지만 권현은 요란한 걸 싫어한다. 작가의 성향에 따라 전시 오픈 파티의 규모와 성격도 조금씩 바뀐다. 조우진 주변에 수많은 여성들이 신경 쓰이기는 오늘이 처음이었다. 어리게 보이려 애쓰는 한물간 여성의 거짓된 우아함은 내가 원하는 모습이 아니다.


냉장고 안에 진열돼 있는 소주병이 눈에 들어온다. 차가운 커피에 소주를 타서 먹어본 적이 있었다. 커피 향과 소주 향이 혼합되어 색다른 열매 향처럼 매콤하게 달았던 기억이 난다. 뜨거운 커피 안에 차가운 소주를 섞어서 마신다면? 커피 온도는 낮아지고, 나는 조금 더 뻔뻔스러워질지도 모른다. 소주를 한 병 꺼내서 먹다 남은 커피 깡통의 주둥이로 부어본다. 한 모금 마셔본다. 괜찮았다. 나머지 커피 소주를 한 번에 쭈욱 들이켰다. 뜨겁지 않았다.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졌다. 편의점 직원은 아닌 것 같았다. 일부러 확인하지 않는다. 첫눈이 내리는 날, 커피캔 안에 소주를 섞어 마시는 여자는 흔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에 이상한 짓거리가 어디 이것뿐이겠니? 커피 깡통이 의외로 용량이 깊은가 보다. 소주병에 남은 액체가 얼마 되지 않았다. 편의점에 소주병을 남겨두고 문을 나섰다.


어느새 눈송이가 굵어져 있었다. 신문사에서 나올 때 우산을 챙기는 걸 잊었다. 이미 발걸음은 프리테오스로 향하고 있는데, 또 순간 잠시 망설여진다. 다시 편의점으로 들어가는 게 귀찮아졌다. 프리테오스까지 걸어서 사오분 거리다.


눈을 맞으며 걸어가는데, 누군가 옆으로 다가와 우산을 씌워준다. 취한 것도 아닌데, 누군가 곁에 온 게 당황스럽지가 않았다. 마치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처음 보는 그 남자가 씌워주는 우산이 포근했다. 키가 큰 남자가 안경을 쓰고 위에서 내 눈을 내려다본다.


"감사합니다~ 저는 저기 보이는 건물까지만 가면 돼요."


그 남자가 묻지도 않았는데,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저 빌딩이 프리테오스 아트센터인가요?"


그가 듣기 좋은 음성으로 물었다.


"네~ 거기 가세요?"


"네. 같은 목적지네요~"


그가 편안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첫눈이 내리는 날, 낯선 남자의 우산 속에서 뻔뻔하고 싶은 여자가 함께 걸어간다.


프리테오스에 이미 도착해있던 권현이 나를 발견했다. 그럴 필요가 없는데, 내쪽으로 달려온다.


"현준아, 눈도 오는데 잘 찾아왔네~"


권현이 내 옆에 서있는 남자의 손을 악수하듯이 덥석 잡으며 반갑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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