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모자 도둑 20(최종회)

by 도라지

내 옆에서 우산을 받쳐주었던 남자가 성에가 낀 안경을 벗으며, 권 현과 다정하게 허그했다.


"누나, 반가워요~ 이년만이죠?"


"그래, 이 자식~ 그동안 더 멋있어졌는데. 밴쿠버 물맛이 좋았구나. 그런데 이기자랑 둘은 언제부터 아는 사이?"


권 현이 그 남자에게로 쏟아붓던 시선을 옮겨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러자 현준이란 남자가 대답했다.


"십분 전부터 아는 사이, 나를 여기로 인도하신 분~ 오는 길에 만났어. 누나랑 지인 같으신데,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저는 권현준이라고 합니다. 권 현 누나의 사촌동생입니다."


권현준의 인사를 받으며, 권 현이 이년 전 가을에 밴쿠버 여행을 다녀왔던 기억이 났다. 그때도 물론 권 현의 여자친구가 동행했었다. 그렇다면 이 남자도 권 현이 레즈비언이라는 걸 알 수도 있다.


"네, 반갑습니다~ 저는 이진영이라고 합니다."


그가 내미는 손을 잡으며, 그의 안경을 벗은 눈을 가만히 바라본다. 착하고 깊고 고집있는 눈빛이었다. 조우진이 구태여 이쪽으로 향하여 오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이기자님~ 옆에 계신 분은?"

하고 조우진이 물으려 할 때, 권 현이 먼저 소개를 시킨다.


"여기는 제 사촌동생 권현준입니다. 아마 대표님과 동년배일 거 같으네요. 밴쿠버에 있는 회사에 근무하다가 엊그제 귀국했어요. 어른들께 인사드리러 온다길래, 모처럼 얼굴도 볼겸해서 제가 초대했습니다."


두 남자가 인사를 나누었다. 조우진이 내 눈을 맞추며 말했다.


"이기자님, 잠시 나눌 말씀이 있는데요."

"급한 거 아니시면, 다음에 해도 될까요? 저도 오늘 전시회 스케치해서 원고를 넘겨야해서요."


나의 거절이 담긴 대답에 조우진의 안색이 순간적으로 어두워졌다. 명석한 조우진이 금세 다시 입가에 세련된 미소를 짓는다.


1층 뒷문쪽에서 성은희와 김도훈이 함께 걸어 들어온다. 첫눈 오는 날을 기념하며 화해의 담배라도 나누어 피우고 들어온 것 같았다. 김도훈의 눈빛이 흐트러지지 않는 걸로 보아, 김도훈도 마음의 갈피를 잡은 듯이 보였다.


성은희의 전시가 아니라서, 대훈대학교 4인방은 보이지 않는다. 김도훈이야 권 현의 동기라지만, 지역내 다른 작가들 전시에 성은희가 나타난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오늘은 버버리 패턴의 페도라를 쓰고 왔다.


전시회 오픈을 알리는 조우진의 인삿말과 함께 파티가 시작되었다. 권 현의 성품처럼 소란스럽지 않으면서 절도있게 열정적인 저녁이었다. 성은희는 여전히 주인공 행세를 하고 싶어하지만, 여기는 오늘 권 현의 땅이다.


권 현의 작품세계는 흑과 백색뿐이다. 수묵으로 세상을 표현하는 권 현의 기개에는 다른 작가들에게선 볼 수 없는 불굴의 혼이 담겨 있다. 강렬하고 차갑고 끝이 없다. 그래서 두렵기조차 하다.


"저는 누나의 저 차가운 강렬함을 좋아해요~"


전시실에서 권현준이 어느새 내 옆으로 다가와 있었다.


"그런데 그게 이진영씨한테도 있더군요. 아까 편의점에서 뜨거운 커피에 차가운 소주를 부어서 먹는 거 봤어요."


그가 깊은 눈으로 내 눈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결혼했어요?"

"아니오."

"약혼자 있어요?"

"아니오."

"그럼 나랑 사귑시다."

"왜 남자친구 있느냐고는 묻지 않나요?"

"있어도 상관없어요. 내가 당신과 오늘 처음 만났으니까요. 우리가 새로 시작하는 연인이 될 거라서요."


권현준의 돌발적인 제안이 싫지 않았다. 오래 보지 않았으나, 거짓과 가면이 없어 보인다. 깊은 밤 어둠을 밝히는 눈빛이다. 탐구자인 나의 기질에 어울릴 법한 연인답게 명쾌한 눈을 가지고 있다.


"좋아요. 함께 시작해봐요~"


나는 망설이지 않았다. 생물학적 요소로 구성된 권현준의 눈빛에서 신화적 요소의 희망을 보았다. 나는 본능이 이끄는 이성대로 그의 눈빛을 빨아들인다. 이 사랑의 시작에는 "연인"이라는 라벨이 붙을 것이다. 권 현이 우리 둘이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둘이 시작하는 건가? 두 사람 너무 잘 어울린다는 거, 알고 있니? 정말 놀라울 정도야~"


그리고 조용히 권 현이 나를 붙잡고 묻는다.


"성작가 모자 도둑은 누구야? 이기자, 넌 알고 있지?"


"네, 확실하게 알아요. 그런데 범인의 사건 이야기가 너무 기네요. 다음에 해드릴게요. 이제 모자는 없어지지 않을 거예요. 범인이 성작가의 포로로 잡혀 있거든요."


아도르노의 <미니마 모랄리아> 옆에서 화사하게 웃고 있던 한기태의 스물여섯살 연인의 모습이, 첫눈이 내리는 저녁에 보이지 않는 별처럼 떠올랐다.


권현준과 둘이서 프리테오스를 빠져나왔다. 마흔의 여자가 첫눈이 내리는 밤길을 마치 처음 걸어보는 사람처럼, 까만 밤 하얀 세상은 온통 신비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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