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육인야화 09화

(소설) 육인야화 9

by 도라지

테이블에 둘러앉아있던 다른 다섯 명의 독자들과 연우가 고궁 숲길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눈부신 햇살이 나무 가지 사이로 부서져 들어오는 숲길 위에 모두들 서 있는 것 같았다.


아름다운 키스였다. 그런 키스는 인생에 여러 번 오지 않는다. 땅 속에 깊이 뿌리 박혀있는 튼튼한 나무들이 뿜어내는 숨결 속에서, 파란하늘은 어느새 고궁 속에 들어가 있는 적토마에게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끼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모두들 아련하게 설레는 표정들을 짓고 있는 속에서, 검은표범이 어두워진 낯빛으로 모두의 상상을 깨트리며 외쳤다.


"아름다운 키스신이네요. 파란하늘님은 저녁 약속이 있으시잖아요, 해리포터랑~ 적토마가 이야기의 방향을 잃을까 봐 말씀드리는 겁니다."


적토마가 오히려 검은표범에게 고마워하는 눈치다. 키스까지는 했는데, 적토마도 그다음 장면을 어떻게 이어가야 할지 난감했던 모양이다.


파란하늘이 다시 이야기를 이어받았다.


<파란하늘은 입술로만, 혀로만 적토마를 느끼지 않았다. 싱그러운 대지의 숨결과도 같은 적토마의 건강한 숨결이 그녀의 오뚝한 콧등을 지나 옆얼굴을 타고 귓바퀴를 간지럽힌다. 그의 숨결이 뜨겁다. 적토마의 입술이 숲 속을 헤매듯 그녀의 머릿결 속을 헤매다가 그녀의 하얀 목 위로 미끄러져 내려왔다. 파란하늘의 기다란 몸이 포물선을 그리듯 뒤로 활처럼 휘어진다.


얼마쯤 떨어진 곳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파란하늘의 목 위에서 적토마의 눈이 저쪽을 응시하다가 그녀의 휘어진 몸을 일으켜 세운다. 그녀를 더 안고 싶은 욕망을 억누르며, 두 사람이 다시 산길을 걸어 고궁 주차장으로 내려왔다.


파란하늘이 저녁 약속이 생각났다. 해리포터의 전화번호도 모른다. 약속을 미룰 수도 없다. 그녀의 오피스텔 앞에 차를 세우며 적토마가 다급하게 물었다.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저는 주중에는 일을 해야 해요. 토요일에 만날까요?"


두 사람이 토요일에 만나기로 약속했다. 파란하늘이 차에서 내렸다. 오피스텔 건물로 들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적토마가 한참 동안 바라본다. 이런 기분 태어나서 처음이다. 남자가 필요한 여자들은 많았다. 하지만 저 여자는 사랑 때문에 절벽에서 뛰어내릴 것 같다.>


파란하늘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연우의 머릿속에, 불쑥 수현의 얼굴이 떠오른다. 사랑 때문에 절벽에서 뛰어내릴 것 같은 여자, 연우가 아는 사람 중에는 수현뿐이다.


어느 늦은 봄날의 저녁이었다. 수현이 연우의 작업실 창문에 기대어 속옷 차림으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연우가 담배를 싫어하는 줄 알기에, 연우가 있을 때는 작업실에서 수현은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 블라인드를 내리지 않아서 수현의 몸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연우가 급하게 작업실로 올라갔다. 범준이 다른 여성과 섹스를 즐기고 있었다. 수현이 1:2로 뒤엉켜있다가 담배가 급했던 모양이다.


연우를 보자마자, 수현이 얼른 담배를 끄며 뒤로 감춘다. 범준은 눈인사를 날리며, 하던 일을 멈추지 않았다. 연우가 창가로 다가서며 수현에게 말했다.


"블라인드~"


수현이 블라인드를 내렸다. 섹스와 사랑, 연우는 그 깊은 연결과 무관함에 대하여 수현에게 배웠다. 수현은 함께 섹스를 나눈 다른 여성에게 말하곤 했다.


"중요한 건 우리가 나눈 시간이야. 함께 한 시간만이 우리를 증명하지."


연우는 '시간'의 의미를 수현을 통해 깨달았다. 인간과 인간이 서로 사랑을 나눈 시간, 소멸하는 시간, 단지 기억 속에서만 존재하는 그 시간 속에 인생의 의미가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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