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육인야화 11화

(소설) 육인야화 11

by 도라지

파란하늘의 세미 누드화 포즈에 관한 결정을 끝으로 릴리에서 세 번째 모였던 독자들이 집으로 돌아갔다. 포즈에 관한 열띤 토론을 들으며, 연우는 커피 두 잔을 연거푸 마셨다. 차라리 와인을 마실 걸 그랬나 보다.


릴리에서 연우의 집은 멀지 않다. 작업실이 조금 더 가깝고 그다음에 연우의 집이 보인다. 작업실 건물 앞을 지나며, 연우가 작업실을 올려다보았다. 불이 꺼져 있다. 오늘은 아무도 오지 않았나 보다. 연우는 불 꺼진 작업실에는 어두운 밤에 들어가기가 싫어진다. 작업실 창문을 올려다보는데, 뒤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작가님, 댁이 이쪽이신가 봐요."


낯이 익은 목소리였다. 인간을 향한 연민의 감정 같은 건 일찍이 배워본 적이 없을 것 같은 냉철한 저 목소리, 검은표범이 어둠 속에서 불쑥 말을 건네 왔다. 연우는 소리에 매우 민감하다. 연우가 가로등 불빛 쪽으로 몇 걸음을 더 옮기며 말했다.


"검은표범님 목소리 같은데, 캄캄해서 잘 안 보이네요. 이쪽으로 조금만 나오시겠어요?"


검은표범이 어둠을 뚫고 나오듯이 큰 걸음으로 가로등 불빛 아래로 모습을 드러냈다.


"작가님께 궁금한 게 있습니다. 작가님의 작품 속에는 가끔 신이 계신 것처럼 묘사되기도 하는데요, 작가님은 신의 존재를 믿으세요?"


집에 돌아가 잠을 청해야 하는 시간에 느닷없이 신의 존재에 관한 질문이라니, 연우가 난감해진다. 이 자리, 지금 이 시간을 어떻게든 벗어나야만 한다.


"저는 종교가 없어요. 제 작품 속에 간혹 언급되는 신의 개념은 문학적 요소로서 가져온 것일 뿐, 그 어떤 종교의 신의 모습과도 일치하지 않을 거예요. 검은표범님께서 말씀하시는 '신의 존재'의 의미가 기독교적 관점의 신을 말씀하시는 거라면, 아마 저는 아닐 겁니다."


연우는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는 표현을 그렇게 말했다. 검은표범이 또 무슨 말인가를 꺼내려고 할 때, 연우가 작업실 건물 1층에 있는 편의점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급하게 인사를 건넸다.


"다음 주 일곱 시에 뵙겠습니다. 제가 뭘 잘못 먹었는지 배가 아파서요. 편의점에 뭐라도 있는지 가봐야 할 거 같아요. 안녕히 가세요~"


키가 큰 검은표범이 다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연우가 편의점에서 주섬주섬 몇 가지를 골라 담은 뒤, 편의점 문 앞에서 검은표범이 나타났다가 사라진 쪽을 바라본다.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았다. 저녁 늦게 마신 커피 탓인지 공연히 민감해진 것도 같았다. 그래도 검은표범은 어딘가 으스스한 데가 있는 사람이다. 연우가 편의점을 나와서 집으로 가지 않고 4층 작업실로 올라갔다. 연우의 작업실에 불이 켜졌다.


일본에 가있던 범준이 돌아왔나 보다. 연우의 책상 위에 비행기 그림이 그려진 메모지가 있었다. 늘 별다른 말도 적혀있지 않았다. '나 다녀간다'와 작은 경비행기 그림이 그가 생존 신고를 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카톡도 열어놓고는 있으나, 그는 구태여 올드한 메모지와 펜을 활용한다. 범준의 유치한 비행기 그림이 연우의 마음을 편안하게 감싸준다. 범준은 연우에게 가족이고 친구이며 스승이었다.


그날 밤 집으로 돌아온 연우는 꿈을 꾸었다. 하얀 돛단배를 타고 수현이 멀리 떠나는 꿈이었다. 수현은 약속이라도 받아내려는 사람처럼 강인한 눈빛으로 연우에게 말했다.


"절대 지지 마~ 순순히 이 강을 건너서는 안돼."

"그럼 언니는 왜 그 배를 탄 건데?"


수현은 알 수 없는 미소를 슬프게 지어 보이며, 하얀 돛단배는 멀리 사라져 갔다. 연우가 꿈에서 깨어나는데 베갯잇이 흠뻑 적셔져 있었다. 현실 속 연우의 방이었다. 커튼 뒤로 햇살이 비추고 있었다. 까닭도 없이 슬픔에 찬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단지 꿈일 뿐인데도, 수현이 사라지는 것은 꿈에서조차 끔찍하게 슬펐다.


일주일이 흐르고 다시 릴리의 저녁이 찾아왔다. 파란하늘은 오늘 적토마와 첫 섹스를 기념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한껏 치장을 하고 등장했다. 가만있어도 아름다운 여자가 한층 더 매력적인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파란하늘은 작품 속에서도, 키가 작고 통통한 해리포터와는 단지 그림을 그려주는 작가와 모델로서만 지내고 싶은 눈치였다. 그녀의 이야기 속에는 그녀의 벗은 몸을 캔버스에 옮겨야 하는 해리포터의 감정이나 사건들이 전개되지 않았다. 그녀는 토요일에 만나기로 한 적토마와의 데이트를 얼른 진행시키고 싶어 했다.


<토요일이다. 적토마의 차가 파란하늘의 오피스텔 앞에서 기다린다. 그녀가 적토마의 차에 올라타는 모습을 편의점을 다녀오던 해리포터가 우연히 보게 된다. 해리포터는 요즘 온통 파란하늘 생각뿐이다. 잘 생긴 남자가 차에서 내려서 있다가, 그녀가 차에 올라타자 그녀 쪽 차문을 닫아주고 운전석으로 향했다. 수입산 차가 오피스텔 앞을 미끄러지듯이 출발한다.


해리포터가 어젯밤에 파란하늘에게 물었었다. 토요일에도 작업을 계속 하겠느냐는 해리포터의 질문에, 그녀가 친구들과 약속이 있어서 어렵다고 했었다.


친구들이 아니라 남자였다. 해리포터의 마음에 일종의 배신감같은 감정이 소용돌이친다.>







keyword
이전 10화(소설) 육인야화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