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육인야화 10화

(소설) 육인야화 10

by 도라지

인생의 신비한 비밀을 캐는 작업이 모든 인간에게 할당되는 것은 아니다. 그 은밀한 광산으로 불려가는 사람들은 삶의 슬픔을 이미 아는 자들이다. 신은 그들만 따로 광산으로 부른다. 연우와 수현은 그 광산에서 만났다.


연우는 수현을 광산에서 만나고, 영원히 수현의 곁을 떠나지 못할 것을 알았다. 연우와 똑 닮은 영혼이었다. 시공간 속에 존재하는 육체만 늙어갈 뿐, 수현과 연우의 영혼은 늙지 않는다. 마치 아킬레우스의 어머니가 스틱스 강 속에 아들의 몸을 담갔던 것처럼, 슬픔의 심연에 이르렀던 영혼들은 늙지 않는다. 시간의 영속성과 인생의 무의미함의 상관성을 깨우친 영혼들에겐 시간의 흐름은 더 이상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더 슬픈 영혼들이다.


인생에서 떠나가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바람에 흩어지듯 모든 것이 사라져 간다. 그래서 인생은 고귀하기도, 무의미하기도 하다. 무의미한 시간의 영속성을 감당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은밀한 가치를 신이 인간에게 심어놓았다. 그 신비한 문에 접근하는 인간 역시 제한적이다. 사람들은 그 신비한 문을 열기보다, 이미 수확된 생산물로 가득한 평야를 향하여 행진한다.


무의미한 시간의 영속성 속에서 가치 있는 단 한 가지, 사랑 때문에 범준과 수현은 서로를 위해 죽을 수도 있는 사람들이다. 다만 그들은 그것을 사랑이라고 부르지 않고 우정이라 부를 뿐이다. 사랑은 떠나가지만 진정한 우정은 영원히 남는다.


연우가 사랑 때문에 벼랑 끝에서 뛰어내릴 것 같은 수현을 떠올리고 있을 때, 파란하늘이 계속해서 이야기를 이어갔다.


<저녁 7시, 파란하늘이 오피스텔 1004호의 벨을 눌렀다. 그녀의 손에는 노란색과 붉은색의 비모란 선인장 화분이 들려있다. 해리포터가 병원에서보다 말쑥해진 얼굴로 문을 열어주었다.


해리포터는 거짓말처럼 청국장을 끓여놓았다. 오피스텔 안의 열 수 있는 창문들은 다 열어놓고 두 사람이 밥을 먹었다. 파란하늘이 웃으며 말했다.


"열어놓은 창문 때문에 청국장 정체가 들통날 걸요~ 화분이 아니라 공기청정기를 선물해드렸어야 하는데. 후훗~"


가벼운 농담을 하는 파란하늘의 얼굴이 우아하면서도 꾸밈없이 느껴졌다. 그녀의 웃는 모습을 바라보며 참 좋은 사람이라고 해리포터가 생각한다.


"정말 맛있는 식사였어요. 제가 올해 먹은 식사 중에 단연 최고였어요~ 정말 감사해요. 청국장을 보내주신 어머니께도 감사드리고 싶네요."


해리포터의 오피스텔 주방 벽에는 그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해리포터의 음식을 칭찬하던 그녀가, 벽에 걸린 초상화를 보며 감탄했다.


"와, 정말 훌륭한 그림이에요~ 일류 화가의 작품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요. 친구분 중에 화가가 계신가 봐요."


"제가 그린 자화상이에요. 미대에 진학하고 싶었는데, 가난한 시골 살림 때문에 적성에도 안 맞는 방사선과를 들어갔네요. 흐흐"


파란하늘이 해리포터의 자화상을 유심히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부탁을 했다.


"혹시 누드화도 그려본 적 있으세요? 제 세미 누드화를 좀 그려주시면 안 될까요?"


해리포터는 파란하늘이 왜 세미 누드화 부탁을 하는 건지, 그녀가 따로 말하지 않아도 알아들었다. 그녀는 오늘 오전에 MRI로 유방촬영을 했었다. 해리포터가 당장 내일 저녁부터 그녀의 세미 누드화를 그리기로 약속을 했다. 파란하늘은 유방촬영을 하고 전체가 불안하고 두려워졌다. 한편에선 아름다운 순간을 남기고 싶은 마음도 강렬해졌다. 예전에는 없던 마음이었다.


다음날 레스토랑 연주 알바까지 마치고 파란하늘이 저녁 아홉 시에 다시 1004호 벨을 누른다. 파란하늘이 바로 옆집에서 걸치고 왔던 긴 겉옷의 단추들을 망설이지 않고 하나씩 열었다. 그녀의 겉옷이 흘러내리며, 팬티만 걸친 그녀의 나신이 드러났다. 해리포터가 순간 숨이 멎은 채로 질끈 눈을 감았다.>


남자 독자들이 그녀의 나신을 상상하느라 정신들이 혼미해져 있을 때, 파란하늘이 남자 독자들을 향해 물음을 던졌다.


"어떤 자세가 좋을까요? 어떻게 포즈를 취해야, 저의 아름다움이 극대화될 수 있을지, 그걸 함께 고민해야 할 거 같아요."


남자 독자들은 파란하늘의 나신을 벌써 실제로 보기라도 한 것처럼, 이런 자세 저런 포즈에 대한 의견들이 분분했다. 우아한 몸짓으로 파란하늘은 남자 독자들의 포즈 요청에 적극적으로 따라주었다. 한 시간가량의 토론이 끝나고 그녀의 세미 누드화 포즈가 결정되었다.


그녀가 전면을 향하여 약간 옆으로 비스듬히 서있는 자세에서, 고개를 30도가량 떨군 채 양손으로 그녀의 머리칼을 위로 쓸어 올리는 모습이다. 그녀의 아름다운 몸의 선들을 다 드러내 보일 수 있는 포즈였다. 연우는 책 속에 기록될 단 두 줄의 포즈 설명을 위해서, 독자들이 열렬하게 토론하는 모습이 마냥 신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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