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기야, 너는 여자를 많이 만나봤으니까 사랑이란 게 뭔지 알고 있는 거지?"
중학생 시절 명작 소설을 읽으며 가졌던 질문이 마흔아홉 살 친구의 입에서 다시 튀어나오고 있는 것을 바라보며 성기는 꽤 난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성기는 민재의 복잡해 보이는 두 눈을 말없이 바라볼 뿐이었다. 사춘기 소년처럼 정말로 사랑이란 게 뭘까 궁금해진 민재가 성기를 다그치며 재차 물었다.
"사랑이 뭐냐고, 인마~ 섹스와 사랑이 어떻게 다른 거냐고. 내 말 듣고 있는 거지?"
반백의 나이지만 성기도 사랑이 무언지 모르기는 마찬가지였다. 처음 만난 여자와 섹스를 하긴 쉬워도, 누군가를 진심으로 오랫동안 사랑해본 사람은 지구 상에 흔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성기가 짙은 눈썹을 내려뜨리며 생각에 잠긴 석가모니상의 얼굴을 하고 있을 때, 그들의 옆 테이블에 앉아있던 단발머리의 여자가 오른쪽으로 몸을 휙 돌려 앉으며 민재를 향해 말했다.
"아저씨, 사랑과 섹스의 차이가 궁금하세요? 낮에는 그 사람과 같이 있으면 할 것도 없고 하고 싶은 것도 없는데 밤에만 같이 자고 싶으면 그냥 섹스 상대인 거고요, 낮에 함께 있으면 든든하고 좋은데 밤에 같이 잤더니 별로이면 좋은 친구인 거겠죠. 낮에도 계속 같이 있고 싶고 어제도 했는데 오늘 밤에도 또 하고 싶은 사람이 사랑 아니겠어요? 딱 한 사람 하고만 무인도에 가서 살아야 한다고 할 때, 함께 가고 싶은 사람이 바로 사랑이라고 생각하면 돼요. 그런데 그것도 사람마다 차이가 있더라고요. 어떤 사람은 무인도에 노예를 데려가고 싶어 하는 경우도 있고, 누군가는 친구를 데려가고 싶어 할 수도 있어요. 그런 류의 사람들은 노예를, 혹은 친구를 사랑한다고 스스로 생각을 지어내기도 해서 사람들을 헷갈리게 만들죠. 미숙한 정신의 취향을 자위하는 형태의 부류들이지만, 그들의 취향도 존중받을 권리는 있을 거예요. 아저씨가 궁금해하는 거에 대한 답이 됐나요? 후훗~"
여자는 그 옛날 윤리선생처럼 세상에 무심한 듯 냉소적이지만 통찰력 있는 깊은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그녀가 예언자처럼 몇 마디 말을 전달하고는 다시 몸을 홱 돌려 그녀의 테이블에 자세를 고정시켰다. 여자의 행동이 얼마나 날렵한지 그녀가 도포라도 걸치고 있었다면, 도포 자락에서 쉬익~하고 바람 소리가 날 것만 같았다.
낯 모르는 사람의 말 따위 귀담아들은 적이 없는 민재가 순진한 학생처럼 당돌한 여자의 가르침을 가슴으로 받아 적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여자는 분명히 민재와 성기가 앉아있는 쪽을 향해 얼굴을 돌리고 말했으나, 그녀의 형형한 눈빛과 또박또박한 음성만이 몇 분 전의 상황이 실재했음을 기억 속에 저장시키고 있을 뿐, 순간적으로 머물다간 여자의 얼굴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형체도 느낌도 없는 '무'의 현현처럼 민재의 뇌리 속에 각인되었다.
"그러면 낮과 밤에서 더 중요한 쪽을 반드시 하나만 택해야 한다면요, 어느 쪽이 더 중요할까요?"
그녀의 테이블 앞에 정좌해있는 여자의 뒤통수를 향하여 질문을 던진 민재가, 어느새 제자의 마음으로 간절하게 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람마다 다르겠죠~ 그래프로 그려본다고 생각해보세요. 49대 51로 조금이라도 내게 더 중요한 의미를 갖는 쪽이 칸을 더 차지하게 되니까, 아마 그쪽을 택하면 되지 않을까요?"
여자가 매우 가볍고 편안한 웃음을 지으며, 다시 한번 몸을 돌려 빠르게 말을 내뱉고는 도로 제 자리로 돌아 앉았다. 여자가 얼굴을 돌려서 보여준 시간이 짧기도 했지만, 이번에도 민재에게 여자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태풍과 파도를 다 잠재운 듯 고요한 바다의 깊은 평온을 담고 있는 두 눈만이 그녀가 가지고 있는 얼굴 전부인 것처럼 느껴졌다. 저런 눈빛은 고등학교 때 윤리 선생 이후로 처음 마주하는 눈이었다. 여자의 맞은편에 앉아있던 늙은 남자의 목소리가 민재의 귀에 들려왔다.
"이작가, 그 승질머리는 언제쯤 고쳐질까? 쯧쯧, 남의 일에 끼어들지 좀 말아요."
"제가 또 오버했지요? 답답해서 저도 모르게 또 실수했네요. 저분들 지천명은 돼보이시는데 아직 사랑을 모르다니, 저 지금 많이 놀라고 있는 거 티 나죠? 흐흐흐..."
"사랑이란 거 모를 수밖에 없어요. 원래 존재하는 게 아니니까요. 나는 사랑을 <한없이 착한 마음>이라고 정의하고 있거든요. 마음이란 게 원래 존재하는 게 아니라서, 사람들이 사랑을 지성으로 파악하는 게 불가능한 거 아니겠어요?"
민재는 잠시 옆자리에서 들려오는 그들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었다. 시끌벅적하게 웅성거리던 고깃집 내부의 모든 소리가 사라지고, 기이한 두 남녀의 대화만이 민재의 달팽이관을 통해 흡수되고 있었다.
마음속에서 왜 자꾸만 알 수 없는 질문들이 떠오르는 건지, 민재는 도통 그 까닭을 알지 못했다. 민재는 방금 전에 여자가 말했던 것처럼 자신의 욕망의 분포도를 그래프로 그려본다.
'나는 낮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놈인가, 아니면 밤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놈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