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오드 아이 24 (최종회)

by 도라지

계획이 없는 것이 계획이라고 했던 어느 영화의 대사가 현경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아무리 계획하고 철저하게 일처리 했다고 한들, 인생의 많은 일들은 언제나 예기치 않은 방향으로 현경을 이끌어가기도 했다. 현경의 인생에서 계획대로 된 것이라곤 이혼뿐이었던 것만 같다.


병원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온 현경은 두 딸들과 함께 한우식당에 가서, 그동안 몸매 관리하느라 소식했던 것을 보상이라도 하듯 저녁을 푸짐하게 먹었다. 오늘만큼은, 예쁘고 날씬한데 병든 여자보다 좀 뚱뚱해도 건강한 여자가 백번 낫다는 생각이 드는 날이다. 민재와 첫 섹스를 나눌 환상에, 현경은 지난 보름 동안 제대로 풍족한 섭생을 하지 못했다. 싱그러운 아침에 피어난 꽃 같은 딸들과 이렇게 건강하게 사는 것이 행복이지, 민재도 사랑도 아무 의미 없는 허망한 짓처럼 여겨졌다.


하은은 월요일 아침 민재에게 버림받은 여자라는 결재서를 받고, 토요일까지 죽은 듯이 근무에만 충실했다. 병원에서 함께 근무하는 직원들은 민재와 하은의 낌새가 달라진 것을 눈치채고, 모두들 하은이 결국 버려진 여자가 되었음을 한결같이 축하하는 분위기였다.


토요일 오후 한 시가 되어 퇴근 무렵, 직원들 보란 듯이 민재가 하은을 진료실로 불렀다. 그리고 나머지 일을 최유정에게 맡기고 민재는 하은과 둘이서 먼저 퇴근을 했다. 두 사람이 나란히 함께 퇴근하는 뒷모습을 바라보던 직원들이 서로 눈빛들을 교환하며, 저마다의 생각이 가장 정확할 거라고 확신이라도 하는 듯이 열띤 토론을 펼쳐댔다.


민재가 운전하는 차에 올라탄 하은이 아무 말도 못 하고 주눅 들어 있는 모습이 민재는 오늘따라 왠지 밉지가 않았다. 아무 때나 무엇을 부탁해도 다 들어주는 여자가 고졸이면 어떻고 조무사면 어떠한가. 며칠 사이 하은의 몸이 조금 날씬해진 것도 같았다. 민재의 몸에서 이십일 동안 묵혀놓았던 성욕이 뜨겁게 꿈틀대기 시작했다. 민재는 식당으로 향하던 행선지를 바꾸어 가까운 모텔로 급하게 들어갔다.


천성이 느긋한 하은이라지만, 지난 며칠 동안 하은은 저도 모르게 입맛을 잃을 정도로 낙심해 있었나 보다. 덕분에 하은의 몸에서 2킬로그램이 빠져나갔고, 민재는 하은의 달라진 몸을 빈틈없이 어루만지며 더 깊이 애무해주었다.


볕이 좋은 가을날 오후였다. 민재는 아무 생각도 나지 않을 만큼 하은의 몸속에 자신을 온전히 집어넣고 격렬하게 쏟아부었다. 두 사람이 쏟아낸 땀과 애액으로 흥건히 적셔진 침대 위에서 벌거벗은 민재 옆으로 풍만한 하은이 근심 없는 어린아이처럼 편안하게 누웠다. 두 사람의 눈이 스르르 감기고 얼마가 흐른 뒤, 민재가 눈을 떴을 때 하은은 아예 깊은 잠에 빠져있었다. 하은과 함께 하는 모든 것은 매우 단순하고 본능적이며 생각을 깊게 하지 않아도 된다.


민재는 숙제를 마치지 않고도 뻔뻔하게 등교하는 학생처럼, 이제 인생을 너무 골치 아프게 살고 싶지가 않다. 그들은 오후 네 시경 매우 늦은 점심을 함께 먹었다. 정치나 사회 경제 따위 아무것도 관심 없고 알 수도 없는 여자가 햇살이 들어오는 만두전골 집에 앉아서, 눈앞에 차려진 음식에만 온통 정신을 팔고 있는 모습마저 민재는 싫지가 않았다.


인생에 정치 철학 문학 예술이 다 무슨 소용이더냐, 이렇게 맛있는 음식을 나눠먹고 부모님 보살펴드리며 효도하고, 원할 때 섹스할 수 있으면 행복한 삶이 아니냐.. 사랑이 별거더냐, 같이 자고 같이 먹고 같이 효도하면 사랑이지.. 오늘 민재는 인간이 행복할 수 있는 모든 조건을 다 충족시키는 삶을 살고 있다.


부러울 것 없는 하루가 곧 오십을 맞이할 남자가 앉아있는 전골집 식탁 위로 소탈하게 지나가고 있었다. 민재 아버지께 드릴 만두가 들어있는 종이가방을 든 하은을 태우고, 민재는 아버지가 기다리고 있는 집으로 향했다.


민재의 차번호를 달고 있는 검은색 세단이 아파트 출입구를 통과하며 지하주차장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현경이 저만치에서 바라보았다. 운전석 옆으로 여자의 모습이 있는 걸 확인하며, 러닝복 차림을 한 현경이 어팟을 끼고 공원 방향으로 가볍게 달려갔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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