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오드 아이 20

by 도라지

민재는 신화병원 치매전문센터에서 근무하는 아버지 담당의와 밖에서 점심 식사를 하고 진료실로 돌아오는 길이다. 오상준의 담당의는 독실한 크리스천으로 가끔 있는 병원 회식 자리마저 불편하게 여기는 강박적인 구석이 있긴 하지만, 노인들에겐 그지없이 자애로운 명의다운 면모를 지니고 있다. 민재는 신화병원 근무 때부터 그를 소상히 알고 있어서 아버지의 치료를 그에게 맡겼다.


지난 토요일 저녁 아버지의 속엣말을 다 듣고 난 뒤, 민재의 심경은 오히려 더 복잡해졌다. 민재가 아버지를 집에서 모시고 있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다. 오상준이 치매 판정을 받은 환자라서 간병인의 급여는 민재가 따로 충당하지 않아도 되고, 아버지의 연금도 있어서 경제적 부담 같은 것은 없다.


상준이 하은을 첫사랑으로 착각하는 치매 증세를 보이면서도 상준이 실제로는 하은을 마뜩지 않아 한다는 사실과, 하은이 간병인 자격으로 가끔 민재의 집까지 드나들고 있는 것에 대한 걱정과 불안감에서 상준 스스로 집을 떠나 요양병원에 가겠다는 말을 했던 것까지, 민재는 담당의에게 차분하게 모든 것을 설명하고 조언을 구했다. 하지만 상준이 우려했던 하은과 민재의 연애 이야기는 굳이 덧붙이지 않았다.


담당의는 상준의 상태가 요양병원에 입원할 정도는 아니라고 판단했다. 상준의 치매 증세는 매우 짧은 시간에 사라지는 특성이 있으며, 폭력성이나 타인에 대한 괴롭힘 등이 없다는 점이 그나마 낙관적이라는 소견이었다. 지금처럼 집에 머물며 아들 곁에 있고 싶은 마음이 상준의 진짜 속마음일 거라고 말하는 담당의는, 상준이 첫사랑에 대한 억지를 부릴 때도 첫사랑은 멀리 외국으로 가서 다시는 볼 수 없다는 포기를 갖도록 훈련하는 것을 시도해보자고 했다.


갈등하던 민재의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이제 간병인이 급할 때 하은이 아니라 현경에게 부탁하면 될 일이. 민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누군가 의지할 사람을 필요로 했었다는 것을 깨달으며, 엘리베이터 안에 있는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아버지와 떨어지지 않으려고 애쓰는 머리가 반백인 남자가, 아래로 쳐지고 있는 입꼬리와 등허리에 잔뜩 힘을 주며 서있었다.


민재의 비뇨기과 의원에선 오후에 수술 일정이 잡혀있었다. 오십 대 초반의 남자가 병원에 이미 와서 대기 중이었다. 그가 사십 대 초반에 어딘가에서 그의 페니스 피하 둘레에 삽입해 두었던 실리콘 링을 제거하는 수술이었다. 지난번에 상담을 받으러 왔던 그는, 십 년 동안 여러 여자들에게 극락을 선물했노라고 매우 호기 어린 자랑을 했었다. 쾌락을 위해 써먹을 만큼 써먹어서 어떠한 미련도 없으니 이제는 그의 몸에서 그것을 제거할 때가 된 것 같다고 말하는 그에게선 마치 고고한 선승의 기운마저 풍기는 것 같았다.


평범한 직장인으로 보이는 그가 어디서 얼마나 무수한 여자들과 정사를 벌이며 여자들에게 환락의 기쁨을 선물해주었을지 숫자가 궁금해진 민재가 그에게 이렇게 물었었다.


"숫자가 많을수록 좋던가요?"


민재보다 고작 세 살 위였던 그 남자는 짐짓 어른다운 위엄을 차리며 진지한 눈빛으로 말했었다.


"숫자가 많을수록 하나에 대한 소중함을 잃게 되더군요. 일장일단이 있더라 그거죠. 섹스는 섹스일 뿐, 결코 사랑은 아닙니다."

민재는 그 환자의 이야기를 들으며 하은과의 섹스를 떠올렸었다. 하은과의 섹스는 사랑이라고 할 수 없다는 걸 인정해야만 했다. 결국 민재 자신의 성욕을 해소하기 위한 먹잇감으로 하은을 이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들여다보는 데도 용기가 필요했다. 이제 그 모든 복잡한 감정들의 발생지인 하은으로부터 민재는 벗어나기로 결심했지만, 때로는 천덕꾸러기 같은 하은의 생각 없는 두 눈동자가 자기를 따라다니는 것이 안타깝고 측은하게 여겨진다. 무심한 듯 날카로워 보이는 민재에게, 사람은 쉽게 쓰고 버리는 일회용 그릇이 아니었다.


음경확대 수술을 상담하러 오는 남성들은 의외로 순진하고 깔끔한 인상을 한 평범한 직장인들이 많았다. 병적인 증세 때문이 아니라 상대 여성들이 추구하는 쾌락의 조건을 갖추기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는 순교적인 자세를 보이는 부류도 있었다.


사랑받고 인정받고 싶은 열망은 남자와 여자를 떠나 지구 상에 존재하는 모든 자연 안에 깃들어있는 숭고한 법칙일 따름이다. 기계문명을 사용할 줄 안다는 이유로, 인간은 자연 세계의 법칙 안에서 조금 더 변형된 본능을 강화시켜나갈 뿐이다. 하은을 향한 욕망이라는 본능과 도덕적인 연민 사이에서 민재의 고달픈 갈등은 처음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민재를 향한 현경의 마음도 알게 됐고 아버지의 생각도 알게 됐지만, 하은의 대책 없는 눈빛이 민재는 자꾸만 거슬린다. 아버지를 요양병원에 보낼 것이 아니라, 하은을 믿을만한 다른 병원에 소개해야겠다고 민재는 결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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