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도라지 Apr 21. 2022

(소설) 아담과 애플 19

 

작년 가을 공예비엔날레 전시 이후로 이은정에게 협업 제안을 해왔던 업체들이 몇 군데 있었다. 은정은 제안을 해 온 회사들을 분석한 뒤 그중에 B사를 선택하고 콜라보를 진행 중이다. 봄에 어머니 장례를 치르고 난 뒤, 은정은 B사와의 콜라보 작업에 더욱 매진할 수 있었다. 덩달아 주성훈에 대한 걱정과 연민도 파도에 떠밀리듯 흘러가서 저 멀리 있는 외딴섬으로 보내버린 것으로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다.


가죽공예 수업이 거의 끝나갈 무렵, 꾸에로 공방의 문이 열리며 주성훈이 나타났다. 흔히 볼 수 없는 완벽에 가까운 수려한 외모를 가진 남자의 등장에 수강생 아줌마들의 시선이 일제히 성훈에게로 쏠렸다.


"안녕하세요, 사장님~ 지난번에 주문했던 물건은 잘 받았어요. 제품과 관련하여 상의드릴 게 있으니, 수업 끝나면 말루스에서 잠시 뵐 수 있을까요?"


주문자와 생산자의 관계를 명백히 밝히며 돌아서 나가는 주성훈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수강생들은 다시금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수업을 마무리하고 은정이 말루스로 들어서는데, 넓은 창가에 혼자 앉아있는 주성훈의 옆모습이 마치 덩그러니 홀로 떠있는 섬처럼 느껴졌다.


"그동안 잘 지내셨죠? 어머니 장례식에도 못가보고 미안합니다."


"아니에요. 서로가 입장이 있었는 걸요... "


은정은 주성훈 아내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는 한 마디도 꺼낼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의 짧은 침묵 사이로,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진동벨이 울렸다. 성훈이 일어나서 음료를 받아 들고 자리로 돌아왔다.


"여기 사장님이 안보이니까, 내 맘대로 음료도 받아오고 자유로워진 기분이 드는군요. 신사장님 계시면 본인이 직접 서빙해주어야 한다고 고집을 부리셔서요. 흐흐흐"


은정도 성훈을 따라 입가에 옅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우리가 이렇게 마주 보고 웃지 못할 이유는 하나도 없다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아내 사고 이후로 많이 바빴어요. 처리해야 할 일들이 꽤나 많더군요. 그리고 사람들의 공연한 시선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고 싶기도 했구요. 그러니까 제 말은, 음... 은정씨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는데, 그러질 않은 이유가 있었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은 건가 봐요."


은정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은정씬 여름휴가는 다녀왔나요?"


"아니오~"


"그럼 부산으로 함께 휴가 떠나는 건 어떠세요? 한여름보다 오히려 지금이 요트 타기 좋은 때거든요. 저와 단 둘이 떠나자는 말씀은 아니니까 오해는 말아주시구요. 저는 앞으로 은정씨와 많은 것들을 함께 경험하고 싶어요. 친구라는 카테고리가 안전하다고 생각되신다면 그렇게 생각하셔도 좋구요, 사람 사이에 어떠한 경계를 짓는 걸 원하지 않으신다면 그것도 괜찮지 않을까요?"

 

성훈의 의미심장한 말에 담긴 뜻을 되뇔 겨를도 없이, 은정은 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았다. 난생처음 경험하게 될 일들이 성훈과 함께라면, 그것은 은정에겐 더할 수 없는 행운이 분명했다.


인생은 파도타기다. 인간과 인간이 만나 어떠한 관계를 형성한다는 것 자체가 파도타기다. 인간의 본성은 정면으로 보이는 얼굴에서는 알 수 없는 여러 개의 속성들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생의 파도는 사람을 통해서 온다. 은정은 이제 주성훈이라는 새로운 파도를 타 볼 생각에 가슴이 뛰고 있었다.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또각거리는 하이힐의 높은음과 함께 신재희가 웃음을 흘리며 다가왔다.


"어머, 주대표님~ 정말 오랜만에 뵙네요. 지난봄에 그 사고가 있고 나서, 제가 얼마나 대표님 걱정을 했는지 몰라요. 이렇게 뵈니까 이제 조금 안심이 되네요~ 그래도 얼굴이 많이 핼쑥해지셨어요. 가신 분은 할 수 없고, 산 사람들은 또 살아야죠. 안 그래요, 은정씨?"


신재희의 거침 없는 말들이, 성훈과 은정이 견고하게 세워두었던 모든 조심스러움을 오히려 무너뜨려주는 것 같았다. 인생은 타인들의 시선 속에 시간을 가두어두기엔 너무 짧다.


작가의 이전글 (소설) 아담과 애플 18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