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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라지 Sep 27. 2023

명절 풍경

"네, 수고가 많으십니다. 여기 사창동시장 동문 쪽 주차장 바로 앞인데요, 빨리 출동 좀 해주셔야겠어요. 좁은 골목길에서 차들이 뒤엉켜 빠져나가질 못하고 있습니다."


가끔 내 말투는 매우 진취적이고 어딘가 모르게 알 수 없는 힘까지 느껴져서, 되려 역으로 혹시 군인이냐는 질문까지 이끌어낸 적이 있을 정도다. 물론 이런 말투는 내가 일부러 꾸며내는 건 아니지만, 이쪽 편의 다소 위급한 상황을 진솔하게 설명하려 할 때 주로 그런 말투가 나오는 것 같다.


추석 명절을 앞두고 재래시장 안에 있는 떡집에 송편을 사러 나왔다가, 맞추어 둔 떡은 구경도 못하고 주차장을 한 바퀴 돌아서 다시 차를 돌려 나갈 때였다. 평소에도 협소한 골목길의 사정 때문에 한두 번 애를 먹은 게 니면서도, 그걸 아는 사람이 뻔히 명절 밑에 이 골목으로 들어왔으니 누굴 원망할 수만도 없는 노릇이었다.


가뜩이나 좁은 골목길에서 연속적으로 세 개의 발 모양으로 꼬여있는 다른 차들이 먼저 피해주기를 기다릴 수만도 없어서 우선 112에 경찰관 출동 요청부터 해놓았다. 내가 무사히 여기를 빠져나간다고 한들, 오늘 이 골목길의 상황은 계속 이렇게 난감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경찰은 시장 안의 주차 및 도로 통제에 관해선 아마도 상인연합회의 소임으로 넘길 것이 분명하겠지만, 엄밀히 따지면 먹통이 되는 그 골목길의 도로는 시장 상인들 소관이 아니었다.


예약한 떡집에 전화를 넣어 사정 설명을 하고 오후에 다시 들르겠다는 말을 전했다. 오늘은 매주 수요일 점심마다 부모님을 모시고 외식을 하는 날이었다. 비는 내리고 명절 밑이라 차들은 도로 위로 잔뜩 쏟아져 나와 막혀있는데, 늙은 부모님은 그래도 막내딸을 기다리고 계셨다.


지난겨울에 휠체어를 타야 했던 어머니는 이제 혼자서 걸으시며 아버지와 나란히 동네 마트에도 다녀오시고 식사도 손수 장만하신다. 대장암 수술을 하셨던 아버지는 수술 후 한 달 뒤 전립선암 진단을 받으셨지만, 전립선 쪽은 수술 없이 약으로만 치료 중이다. 무엇이든 잘 드시면 살 수 있다고 우리는 모두 그렇게 생각했다.


매주 다니던 소고기 집이 8월에 문을 닫았다. 그 집이 음식값도 적당하고 맛도 좋았는데, 어느 날 폐업 소식을 접하게 되었을 때 몹시 서운했던 기억이 난다. 그 집의 후속으로 찾아낸 이 집을 벌써 두 달째 부모님과 함께 방문하고 있다. 구십을 앞둔 노부모를 모시고 다니며 식사를 하는 일은 조금 고단한 부분이 없지 않아서, 장사하시는 분들껜 그다지 달가운 손님이 아닐 수도 있다.


부모님과 점심 식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다시 떡집을 가려니 막막했다. 나는 가끔 불법적인 구석이 있는 사람이지만, 주차에 대해서만큼은 벌금 내는 게 무서워서 매우 철저하게 준수하는 편이다. 결국 빈 손으로 집에 돌아온 나는, 조금 일찍 퇴근한 남편의 차를 얻어 타고 다시 떡집으로 향했다.


별 것도 아닌 일에 전략부터 세우는 마누라가 남편 차를 시장 앞 교회 주차장에 대기시켜 놓고, 후다닥 뛰어가서 양손 가득 떡을 사들고 왔다. 저녁으로 간단히 동그라미 냉면을 먹으며 마누라가 남편에게 말했다.


"당신 판소리 수업 가는데 주차하면, 나는 거기서 버스 타고 갈게요. 떡은 이따 수업 끝나고 집에 올 때 들고 오시면 돼요."


남편은 아까 마누라가 떡집에 간다는 소리를 들을 때부터 떡을 싸달라 했었다. 나는 떡집 종이 상자에 송편을 가지런히 넣어 남편 손에 들려 보냈다. 남편은 마누라가 만든 것도 아닌 송편을 싸들고 판소리 교실로 향하고, 나는 시내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버스에 올라탄 사람들 손에 선물 상자가 하나씩 들려 있었다. 검게 물들어가는 하늘에선 가랑비가 가늘게 흩날리고, 선물 상자를 든 사람들이 터미널 정류장에서 내렸다. 버스 창밖으로 후드티 모자를 뒤집어쓴 여학생들이 캐리어를 끌며 명랑하게 떠들었다. 누군가의 가슴엔 슬픈 사연들도 있겠지만, 다시 추석 명절이 왔다. 오늘 밤엔 달이 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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