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조길 가는 길(하)

(잣나무 아래에서)

by 도라지

다시 세조길을 걷는다. 제일 걷기 좋은 코스다. 그래서 저들도 다 알면서 저렇게 배짱을 부리는 건가 보다. 좋은 건 더 많은 사람이 나누어야 하는데 말이다.


법주사 템플스테이 한옥 건물 앞에는 널찍한 주차장 마당이 황토흙으로 깔려 있다. 작년에 거기 주차장 마당 끝에서 청설모 한 마리를 우연히 만난 적이 있다. 우리가 자기를 보고 한참을 서있는데도, 녀석은 겁도 없이 무언가를 손에 들고 열심히 먹고 있었다. 우리를 얕보는 건지 청설모가 우리를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그 녀석을 몇 분 동안 바라보던 남편이 녀석에게 다가서며 말했다.


"야, 인마, 뭘 그렇게 맛있게 먹어? 같이 먹자~"

남편이 녀석에게 다가가 말을 건네는 데도, 어라, 녀석이 도망가질 않는다. 대범한 놈이었다. 그러자 장난기가 발동한 남편이 나뭇가지 하나를 주워 청설모 가까이 던진다. 그제야 놀란 청설모가 손에 들고 있던 것을 내려놓고, 잽싸게 나무를 타고 올라갔다.


남편의 행동이 장난인 줄은 알지만, 밥 먹을 땐 개도 안 건드린다고 했다. 식사 중인 녀석을 좇아버린 게 나는 마음에 걸렸다.


"아니, 잘 먹고 있는 애를 좇아버리면 어떡해요?"


나의 핀잔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남편이, 청설모가 먹던 것을 집어 들며 말했다.


"아이고, 이 녀석 보게~ 이거 잣나무 열매네. 안에 잣들이 잔뜩 들었어~"


그 말에, 내가 부리나케 남편 옆으로 따라붙었다. 해가 질 무렵이었다. 그날 청설모가 먹고 있던 잣나무 열매 한 개를 주워 가지고, 남편과 사이좋게 집으로 돌아왔다. 열매 하나에 잣들이 얼마나 실하게 많이 들었던지, 그거 까먹는 재미가 쏠쏠했었다.


며칠 전 세조길의 끝 지점인 세심정까지 갔다가, 119 구조대가 등산객을 실어 나르는 영화 같은 장면을 구경하고 내려오는 길이었다. 법주사 템플스테이 마당에 다다를 때쯤, 작년에 만났던 청설모가 생각이 났다. 아니, 잣나무 열매가 생각이 났다.


"여보, 오늘은 청설모가 안 보이네요~ 작년 이맘때였는데.. 잣이 없나?"


시골 출신 남편이 잣나무 아래로 먼저 걸어가 본다. 땅바닥을 살피던 남편이 잣나무 열매 세 개를 발견했다. 작년처럼 집으로 가져가자고 한다.


"아예 여기서 까서, 잣만 가져가요."


땅거미가 내려앉고 있었다. 마누라의 지령에 남편이 주위에 떨어져 있는 나뭇가지 하나를 주워 들고 잣나무 열매에서 잣만 쏙쏙 떨어뜨린다. 땅바닥에 떨어진 잣들을 마누라가 열심히 주워 담는다. 그새 컴컴해져서 잣인지 돌인지 잘 구별도 안되는데도, 작은 물병 빈 통에 잣이 삼분의 일이나 찼다. 짧은 시간에 얼마나 열심히 잣을 깠는지, 남편은 굽혔던 허리를 펴면서 뒤쪽 허리를 두드렸다.


집으로 돌아와, 빈 물병에 담아 온 잣들을 물로 깨끗이 씻고 키친타월로 닦았다. 껍질들이 작년하고 색깔이 좀 달라 보인다. 도마 위에 올려놓고 작은 망치로 톡톡 두드려본다. 하얀 잣을 먹을 생각에 망치질이 경쾌했다. 잣껍질 열 개를 두드려도 먹을만한 건 겨우 한 알이었다. 알맹이 껍질 색깔이 거무튀튀했던 이유를 금방 알게 되었다. 알맹이들이 습기 때문에 썩어 있었다.


아, 이래서 청설모도 열매들을 가져가지 않고 버려두었던 것이구나. 청설모만큼 똑똑하지도 못한 우리 부부는, 잣 먹을 욕심에 청설모도 거들떠보지 않는 썩은 잣들을 열심히 까서 가지고 왔던 것이다.


(2021년 10월 13일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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