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에서 애 낳은 이야기

이러고 두 번 더

by 갈휘연

캐나다에서의 임신/출산은

한국에서 임신/출산 한 친구들에게 들은

한국의 그것과는 좀 다른 것 같다.


캐나다에선 임신 테스터기로 임신이다 싶으면

일단 패밀리닥터와 약속을 잡는다.

거기서 소변검사로 공식적으로 임신여부를 일단 판단한다.


보통 팸닥 오피스에는 초음파 기계는 없다.

뭔가 기계를 처음 사용했던 게 8주쯤이었나?

아기 심장소리만 듣게 해주는

모니터는 없는 소형 초음파기였던 기억이다.


그렇게 1달에 한번씩 의사를 보다가

한 10주 좀 넘어 첫 초음파를 하고

20주에 한 번 더 한다.

큰 문제가 있지 않는 한

막달까지 더 이상 초음파검사는 하지 않는다.

물론 중간 중간 피검사도 하고 기형아 검사도 한다


20주까지는 팸닥이 봐주고

20주가 넘어가면 산부인과 전문의에게

진료를 연계를 해주는데

그 때부터는 2주에 한번씩 의사를 본다.

나는 운 좋게 팸닥이 산부인과 전문의이기도 해서

처음부터 아이 출산까지 한 의사에게 케어를 받을 수 있었다.


손이 귀한 집 남자과 결혼해서 결혼 한 달만에 한 임신은

양가 부모님과 친인척들 모두에게 매우 반가운 소식이었다.


나도 어차피 낳아야 하는 거 빨리 낳아 키우고 내 일이던 공부던 해야지 하는 욕심으로 부러 피임을 하지 않았다.


그렇게 40주가 흘러 출산 예정일이 다가오고

친정부모님은 산후조리를 해주시기 위해

예정일 즈음해서 우리집에 머물고 계셨다.


예정일이 2-3일 지나도록 아무 소식도 없던 어느날,

오늘도 또 별거 없겠거니,

남편도 여느날처럼 출근을 하고

부모님도 은행일 볼 게 있으시다고 외출을 하셨다.


집에는 나 혼자였다.

꼭 일은 방심할 때, 하필 혼자일 때 터진다.


서재에서 앉아서 노트북을 보고 있었는데

뭔가 움찔하는 느낌이 나더니

다리 사이로 따뜻한 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출산 관련 그 어떤 케이스라도 당황하지 않으려

하도 많이 찾아 공부를 해 둔 덕에

그게 양수파열라는 걸 바로 알았다.


‘아…이제 시작이구나.‘


당시 남편이 박사과정중이라

우리는 UBC Family Residence에 살고 있었다.

주변 친한 이웃 언니들은 보통

BC Women’s Hospital에 많이들 갔는데

내 스페셜 닥터는 벤쿠버 다운타운에 있는

St. Paul Hospital로 분만 병원을 지정해 줬었다.

’남들 다 하는 거 별로야‘ 하는 난

그게 참 마음에 들었었다.


일단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 입으면서 남편한테 전화를 했다.


“자기야. 나 지금 아마 양수 새는 것 같아. 병원 가야겠는데?”

“알았어! 지금 바로 갈께!”


아직 컨트렉션도 없었고 아이도 잘 놀아서 많이 걱정이 되지는 않았다.

그래도 병원에 가서 의사를 봐야 마음이 완전히 놓일 것 같았다.


병원에 도착해서 패밀리 닥터가 가르쳐준대로

응급실을 통해 check in을 했다.

바로 Maternity Unit으로 안내를 받고 올라갔다.

올라가자마자 상황을 연락 받았는지 진료실로 다시 안내를 받았고 거기서 간호사가 바로 내진을 했다.


3cm가 열렸다고 했다.

일단 양수파열이 됐으니 아이 움직임과 심박수 측정을 위해

모니터를 배에 부착을 하고 한시간 쯤 베드에 누워 있었다.


그리고

한국이라면 상상도 못할일이 벌어졌다.


집에 갔다 오란다.


첫출산이라 fully dilated 되는 게 오래 걸릴 것이고

무엇보다 내가 척추주사가 무서워서

무통도 하지 않겠다고 해서

어차피 8-9cm가 열리기 전까지

자기들이 해줄 게 없다면서

편한 집에 있다가 다시 오라는 것이었다.


황당하긴 했지만

말을 들어보니 틀린말은 또 아니기도 하고

집이랑 10-15분이면 도착할 수 있으니

알겠다고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돌아오니

일을 보다 말고 호출을 당한 엄빠가

이미 집에 도착해 계셨다.

이제 모유수유 시작하면

매운 거 좋아하는 애가 매운 거 못먹어 생각날꺼라며

엄마는 떡볶이를 잔뜩 해주셨다.


점점 진통은 더 강력해졌고 주기적이 됐다.

진통이 웃긴 게 진통과 진통 사이 휴지기 때는

정말 거짓말처럼 통증이 전혀 없다.


진통을 하는 와중에

그 매운 떡볶이를 씁씁거리면서 반을 해치웠다.

이제 당분간 매운 거 못먹을꺼라 얘기에

나중에 혹 사무치게 아쉬울까봐


집으로 다시 돌아온 지 한 5-6시간이 흘렀을까.


진통은 30분에서 15분 간격이 되는 건 몇시간이 걸리더니

15분에서 10분 간격이 되는 건 불과 1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왠만한 통증은 잘 참는 나도

더이상은 참을 수 없는 지경이 됐다.


남편은 왼손으론 내 손을 잡고

오른손으론 직업병 못버리고

진통 간격을 노트에 기록 하고 있었다.


진통이 10분간격 쯤 됐을 때

병원으로 출발 할 계획이었다.


비명을 지르지 않고는 견딜수 없는 진통이 왔을 즈음

병원 응급실에 도착을 했다.


정말 그건 인간이 참을 수 있는 고통이 아니었다.


아마 인간의 통각의 한계치라는 게 있어서

내가 이 정도만 느끼는 게 아닐까

어떻게 이렇게까지 극강으로 아플 수가 있을까 싶은,

그 전에는 절대로 느껴볼 수 없었던 고통.


아마 뇌가 기억으로 레지스터 할 수 없는 정도라

둘째 셋째를 낳는 게 아닐까 생각도 들었다.


누구는 드릴로 허리를 뚫네

배를 칼로 쑤시네 하던데,

나는 그게 단어나 문장으로 표현이 어떻게 가능하지? 싶을 정도였다.


그렇게 내 몸을

마치 끝나지 않을 것 같이

소용돌이를 치듯이 휘몰아치는 그 극강의 고통을 고작


드릴? 칼?


내 찢어지는 비명소리에

나는 바로 maternity unit으로 트랜스퍼가 됐다.


난 비명과 함께 배정된 방으로 옮겨졌고

이미 낮에 체크인을 했던 덕에

모든 의료장비와 물품들은 준비가 완료 되어 있었다.


St. Paul Hospital이

나중에 더 마음에 들었던 가장 큰 이유는

분만실이 1인 입원실을 겸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내가 배정받은 입원실로

의료진과 의료 설비가 다 들어왔다가

출산이 완료되면 빠지고

산모와 아이 그리고 care giver 한 명이 남는

입원실이 되는 시스템이다.


그토록 척추주사 무섭다고

에피듀럴을 하지 않겠다고 호언장담하던 나를

때려죽이고 싶게 진통은 어마무시했다.

진통을 하면서 통증을 참느라

한손은 남편 손을,

다른 손은 침대 메탈안전바를 잡았는데

남편은 내가 그걸 부러뜨릴 것 같았다고 했다.

물론 본인 손도 바스라질 것 같았다고


진통이 살짝 잦아들었을 때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나 좀 살려줘. 나 죽어... 나 에피듀럴… 제발…“

라며 제대로 울지도 못하고 말했다.

남편도 본인이 할 수 있는 게 없으니

의사와 날 번갈아 보며 같이 울었다.


하긴

내가 처음이듯 그도 처음이었으니…


남편이 에피듀럴이 가능하겠냐고 물어봤지만

이미 10cm가 열렸으니 지금 에피듀럴 준비시작해도

준비완료 되기 전에 애가 나올꺼라고 의사가 그랬단다.


그 와중에 진통의 양상이 바뀌었다.

그 전엔 그냥 휘몰아쳐 정신없는 진통이라면

그건 너무 아픈 나머지 ”윽“소리를 내며

힘을 줄 수 밖에 없는 진통.


이런 인체의 신비라니.


내 몸은 아이의 움직임을 느끼고

아이가 산도에서 좀 더 쉽게 빠져 나올 수 있도록

리드믹하게 컨트렉션을 하고 있었다.


아이의 머리가 보인다는 남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아이의 울음 소리가 들렸다.

나는 너무 정신이 없어서

남편이 아이의 탯줄을 가위로 자르는 걸 보지 못했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진통은 사그라들었다가

마지막에 태반이 나오면서 마지막 진통이 끝이났다.


거즈 타월로 아이를 닦이고

체온 유지를 위해 모자를 씌우고

부드러운 싸개로 아이가 싸여

바로 내 가슴 위로 올려졌다.


내가 ”엄마“가 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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