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 금삿갓이 20여 년 전 국가기간방송사인 KBS의 계열사인 KBSN의 스포츠 채널 대표를 맡고 있을 때였다. 남북관계는 남측의 햇볕정책으로 한창 문호가 열리는 단계였다. 하지만 남북의 방송교류는 꽉 막힌 시기였다. 아니 더욱 막히는 상황이었다. 북한의 장마당과 꽃돼지들의 행태에 대한 적나라한 방송으로 북한의 존엄은 KBS에 대하여 극혐(極嫌)하고 있을 상황이었다. DJ가 노벨평화상을 위하여 햇볕정책으로 북한에 엄청 공을 들이며, 물자와 금전적 지원을 아끼지 않을 때임에도 KBS에 대해서는 유독 싸늘했다. 심지어 남북정상회담을 위해 북한을 방문하는 DJ의 수행단으로 참석할 당연직 한국방송협회장인 KBS 박권상 사장의 입북을 허락하지 않아서 방북 3일 전까지 유동적이었다. 당시 청와대에서 극적인 협상과 성득 끝에 KBS에서 텔레비전 수상기 4만 대를 북한에 즉시 제공한다는 확약을 하고서 겨우 방북을 허가했을 정도다.
<평화자동차 박상권사장 모습>
그러니 계열사가 독자적으로 남북 스포츠나 방송의 교류를 추진하기는 어불성설이었다. 그래도 필자 금삿갓은 우회적인 교섭통로를 다각도로 모색한 결과 길이 보였다. 그것은 바로 북한에 핫라인이 있는 통일교재단을 활용하는 것이었다. 당시 일성건설의 모 대표이사의 도움으로 재미교포이며 평양에 소재한 평화자동차 박상권 사장을 소개받았다. 박사장은 성명이 KBS의 박권상 사장과 이름이 거꾸로여서 일반인이 헷갈릴 정도였다. 그는 다행히 성격이 활달했고, 스포츠에 대한 열정과 추진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우선 그가 할 수 있는 복싱협회장의 타이틀을 만드는 작전으로 들어갔다. 당시 국제 복싱기구는 WBA와 WBC가 양대 산맥으로 있었고, 제3의 조직으로 IBF가 성장세를 타고 있을 때였다. 그래서 우리가 적극적으로 침체된 한국 복싱의 중흥을 기치로 대회 중계방송을 하면서 세계타이틀전을 노린다는 전략을 짰다. 그래서 박상권 사장을 한국 IBF와 한국권투위원회(KBC) 회장으로 옹립하고, 우리 회사와 협력협정을 체결하여 매주 한 경기를 중계 방송하는 것으로 잡았다. 특히 그 당시 코엑스 건물 지하 전체를 대형 스포츠 바(Bar) 형식으로 만들어서 홀 중앙에 특설링을 설치하여 매일 복싱 경기를 개최하고 그것을 중계방송한다는 협약도 체결했다. 실제 수개월간 실행되었으나, 대형 스포츠 바의 운영사(대표 가수 이상민)의 경영 부진으로 단기간에 막을 내리고 말았다.
이런 바탕 위에서 북한과의 스포츠 교류를 위해, 금삿갓은 휴전선의 판문점을 관통하여 개성까지 왕복하는 <국제 평화마라톤 대회>와 북한에 프로 스포츠를 도입시키는 방안을 강구했다. 두세 개의 통로를 활용하여 북한의 아시아태평양위원회와 접촉하며 협의를 진행했는데, 평화자동차 측과 함께 협의한 북한 여자복싱의 프로경기 도입이 가장 빨리 성사 가능성을 보였다. 수차례 실무 협의 결과 최종 합의가 되었고, 첫 경기를 평양이 아닌 중국의 선양(瀋陽)에서 개최하기로 합의했다. 북측이 프로복싱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고, 교류 합의를 추진하던 실무 위원들은 평양에서 개최했는데, 북측 선수가 패했을 경우 책임 추궁이 두려워서 1차적으로 제3지역에서 개최를 주장했다. 당시 북한의 여자복싱은 김광옥, 류명옥 선수를 비롯하여 그야말로 세계 최강이라서 절대 패배가 없으니 평양에서 개최하자고 끝까지 종용했으나 그들은 위험 부담을 하지 않았다. 일보 양보하여 1차전은 심양에서 하고, 2차전은 평양, 3차전은 제주도에서 개최하기로 합의를 한 것이다. 우선 포로복싱을 교류하고 점차 축구나 골프 등 자본주의 스포츠를 북한에 도입시키고자 한 것이었다.
<강참사 모습>
이러한 협력과 행사의 진행을 위하여 우리는 평화자동자 박상권 사장을 중계자로 하여 북한의 실무진들과 났다. 주로 심양(瀋陽)에서 그들을 만났는데, 그들은 북측의 출신 성분이 아주 고위급이고, 남한이나 중구의 사정에도 아주 정통했다. 몇 번 만나보니 가장 놀라운 게 그들의 술 실력이었다. 가장 친하게 지냈던 민화위 강모(姜某) 참사와 보위부 권 모(權某) 참사는 체구도 비교적 작은데 주량이 엄청났다. 심양의 서탑(西塔) 거리에 있는 북한 음식점에서 북한산 술을 1차로 마시고 난 후에 중국식 룸사롱인 K-TV주점으로 가면 이들은 중국 백주(白酒)보다는 위스키를 선호했는데, 한 사람이 한병 이상을 마셨다. 술이 취한 김에 그들을 골려 주려고 다음날 골프를 치자고 했더니 대뜸 좋다고 했다. 북한에도 골프를 하는가 싶어서 농담조로 한 제의였는데 의외로 수락해서 금삿갓이 도리어 놀랐다. 말을 뱉었으니까 하지 않을 수도 없는 도리였다. 부랴부랴 골프장을 섭외해서 부킹을 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심양에는 동림공원(東陵公園) 동백년송림(東百年松林)에 성경(盛京) 골프장이 있었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출장 온 까닭에 클럽하우스에서 모든 장비를 대여해서 운동을 했다. 정말 빌린 골프채의 상태를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아이언 세트를 갖추기는 했는데 부러진 채를 수리해서 만들었는지 3번 아이언이 7번 아이언 보다 짧고, 제품 브랜드도 각양각색의 제품들을 모아서 1세트로 구비해 놓았다. 정말 중국 다웠다.
<권참사 모습>
그런데 의외로 이들 북한 요원들은 우리로 따지면 초보자 수준이지만 그런대로 골프 룰을 알고 제법 같이 라운딩을 할만했다. 어디서 운동을 했냐고 물으니까 평양의 양각도에서 외국 손님들이 오면 같이 가끔 라운딩을 한단다. 북한의 여자 프로복싱 개방을 위한 첫 발걸음을 위해 심양에 와서 만난 북측의 대표단들과 우연히 말장난으로 시작한 것이 골프였다. 이 생각지도 않았던 골프 라운딩이 발전하여 역사상 최초로 사회주의 국가에서 가장 자본주의적인 경기인 프로골프대회를 북한에서 개최하고 이를 전 세계에 중계방송하게 될 줄은 그 누구도 상상을 하지 않았던 이벤트였다. 정말 인생이란 우연한 곳에서 일이 벌어지고 결말도 우연하게 이루어지는 경우가 있는 모양이다. 우리가 접촉한 두 사람의 참사들이 골프를 할 줄 알고, 골프에 대한 이해가 컸던 것이 지금도 아리송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