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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프로복싱이 북한의 문을 열다.

금삿갓 평양 방문기

by 금삿갓

2004년 10월 29일 드디어 공산주의 북한에 드디어 자본주의 스타일의 프로 스포츠가 문을 열고 들어가게 된 날이다. 심양(瀋陽) 즉 중국발음으로 선양은 옛날 청나라의 수도역할을 하던 고도(古都)이고, 우리 민족에게도 유서가 깊었던 곳이다. 옛 고구려의 구토(舊土)이고, 일제강점기에는 많은 애국지사들이나 유랑민들이 이곳으로 흘러들었던 만주(滿洲)의 봉천(奉天)이 바로 지금의 심양이다. 이곳은 청(淸) 나라 초기의 수도였고, 청태조(淸太祖)인 누르하치가 건립한 고궁(故宮)이 있는데, 북경의 자금성보다는 규모가 아주 작은 편이다. 심양 시내의 동서남북에 탑을 세워 방위를 표시했는데, 서탑(西塔) 거리는 조선족과 탈북민, 한국인들이 많이 모여 번화가를 이룬 상업지역이다. 한글 간판도 많이 보이고, 필자 금삿갓이 갔을 때는 북한 음식점들이 많았다.

<사진 가운데 필자, 주황색 상의 일본 수가 도시에, 검은 제복은 북한 김광옥 챔피언, 그외 제작진>
<제작진과 함께>

세계여자프로복싱 경기는 심양의 여명국제호텔 특설링에서 개최했다. 이곳에 우리 제작진과 복싱협회 관계자, 북한 체육계인사와 선수들이 모두 같이 투숙하고 있었다. 북한의 선수는 2003년에 북한 10대 체육인에 선정된 김광옥 선수로 이번 경기는 국제여자권투협회(IFBA)의 밴텀급 타이틀 매치에 도전하게 된 것이다. 기존의 타이틀 홀더는 일본의 수가 도시에 선수였다. 김광옥은 2003년 인도 뉴델리 아시아 선수권대회에서 금메달을 딴 선수로 당시 통산 전적(戰績)이 6승 무패 4KO승을 보유하고 있었다. 158cm의 아담한 체구에서 맷집이 좋고 경기력도 뛰어났다. 김광옥의 주먹은 거의 돌처럼 강했다. 특설링 주변은 무려 100여 명에 달하는 북한 응원단의 일방적인 함성이 울려 퍼졌다. 김광옥은 경기가 시작하자마자 수가 도시에를 코너로 몰아놓고 라이트 스트레이트에 이은 어퍼컷으로 일방적으로 밀어붙였다. 김광옥은 수가가 투혼을 불태우며 끈질기게 버텨내자 한때 약간 지친 기색도 보였다. 경기가 9회에 들어가자 얼굴이 퉁퉁 부어오른 수가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쓰러져 첫 입문 경기를 KO승으로 장식했다.

<북한 여자 선수단>

이날 오픈경기로 열린 랭킹전에서 북한의 류명옥(25. 플라이급)은 일본의 고가 도모코(26)에 6회 2분 37초 만에 KO승을 거뒀고, 또 북한의 최은순(20. 라이트플라이급)은 일본의 가미 무라사토코(29)에 8회 판정승했다. 한편 남자 선수들의 경기도 한국 서울 체육고 소속의 장우광, 박성재, 장환영 등 3명이 중국 베이징 체육학교 소속 선수들과 친선경기를 벌였다. 김광옥이 승리하면서 역사상 북한 선수로는 최초의 프로스포츠 챔피언이 탄생되자, 북측의 참관단으로 온 북한의 체육성 간부와 아태위, 민화위 간부들이 만세를 부르고 한바탕 축제의 장이 열렸다.

<북한 대표단 석단장>

우리는 당시 여건상 중계차를 현지로 이동할 수가 없어서, 심양방송국의 중계차를 임대하여 현장을 녹화하여 KBS 본방송과 KBSN의 스포츠 채널에 녹화 방송을 하게 되었다. 북한 당국은 처음에 이 경기의 승패를 장담할 수 없어서인지 몰라도 경기 내용에 대한 관심이 없었다. 그러다 막상 경기에 승리하자 부쩍 경기 실황 방송에 관심을 표명하기 시작했다. 당시 협상 창구였던 참사를 통하여 경기 중계방송 테이프를 복사해 줄 수 없냐고 조심스럽게 타진해 왔다. 그런데 당시 우리의 방송 방식은 NTSC 방식이고, 북한은 북유럽 방식인 PAL 방식이라서 단순히 테이프를 복사해 가지고 가서는 북한에서 방송은 고사하고 볼 수도 없는 것이다. 방송에 문외한인 북측 대표에게 그런 사실을 말하자 너무 아쉬워했다. 북한 선수의 승리라는 멋진 선물을 콘텐츠로 가지고 돌아가서 북측 고위층에게 점수를 딸 기회였는데, 불가능하니 실망이 그지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이들의 고충을 덜어주고자 심양방송국에 SOS를 쳤다. PAL 방식으로 전환하는 인버터 기기가 마침 있어서, 실황 중계 내용을 가편집하여 PAL전환시켜 그들에게 선물로 주었다.

이들은 정말 큰 선물을 받은 것이다. 중계권료 한 푼 내지 않고 자기네 선수의 세계 타이틀전 승리 경기를 통째로 받은 것이다. 나중에 들은 소식에 의하면, 그들은 그 테이프를 가져가서 조선중앙TV방송국에 넘겨주었고, 조선중앙TV는 그 경기 실황을 방송하자 엄청난 시청률을 기록하여, 무려 같은 콘텐츠를 6번이나 재방송하였단다. 물론 북한이 방송 콘텐츠가 그리 풍성하지 못한 현실이지만 복싱 경기를 6회나 그대로 재방송한다는 것은 우리로서는 상상이 되지 않는 것이다. 경기 후에 북한 대표단과 산수들과 함께 서탑거리에 있는 북한 음식점 모란봉에서 만찬을 가졌다. 이곳에서 북한 대표단은 자신감을 얻었는지 다음 타이틀 방어전은 평양에서 개최하고, 북한 선수의 참여 폭을 넓히겠다고 공언했다. 당연히 류명옥이나 최은순 선수의 실력이 수준급이라서 가능성이 상당히 높았다. 북한 대표단과 합동으로 하는 만찬이라서 그런지 북한 식당의 지배인까지 총출동하여 봉사를 하는데 거의 칙사 수준의 대접을 해 주었다. 음식점 종업원들의 공연도 다른 날에 비해서 훨씬 다채롭고 화려하게 선보여 주었다. 물론 꽃다발 팁 같은 것도 요구하지 않고 정말 신선하게 멋진 만찬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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