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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 鹿柴(녹채) / 녹채

금삿갓의 漢詩工夫(251125)

by 금삿갓

鹿柴(녹채) / 녹채

- 王維(왕유)


空山不見人

공산불견인

○○●●○

빈산에 사람 보이지 않고


但聞人語響

단문인어향

●●○●●

사람 소리 울림만 들려오네.


返景入深林

반경입심림

●●●○○

반사된 저녁볕 숲 속 깊이 들어와


復照青苔上

부조청태상

●●○○●

다시 푸른 이끼를 비추네.

柴(채)는 去聲(거성)이니, 與砦(여채)로 同(동)이라. ○ 空山二字(공산2자)는 是一詩之眼(시일시지안)이라. 不見人(불견인)은 是空說是有人(시공설시유인)이 竝無形質可見(병무형질가견)이라. 人語響(인어향)은 說是無人(설시무인)하고, 又有語響得聞(우유어향득문)하니 此人語在山中者(차인어재산중자)는 非有非無(비유비무)하야. 如在虛空住(여재허공주)라. 返景(반경)은 落日返照之影(낙일반조지영)이 林深而杳冥(임심이묘명)하니 安得日光所入(안득일광소입)이리오. 惟返照之光(유반조지광)이 斜照入深林內耳(사조입심림내이)라.

柴(채)는 거성으로 砦(채)자와 같게 읽어야 한다. 空山(공산) 두자는 이 한 시의 눈이다. 不見人(불견인)은 가설하여 말한 것으로, 여기 있는 사람의 볼만한 형질이 아울러 없다는 것이다. 사람의 말소리는, 사람이 없다고 말하고 다시 말 소리가 들린다고 하였으니, 이 사람의 말이 산중에 있는 것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어서, 마치 허공에 머물러 있는 것과 같다. 返景(반경)은 지는 해가 되돌려 비추는 그림자가 숲속 깊어 그윽하게 어두우니 어찌 햇빛이 들어올 수 있겠는가? 오직 되돌려 비추는 석양빛이 비스듬이 비추므로 숲의 안까지 깊이 들어올 뿐이다.


靑苔在地(청태재지)하야. 日光旣照入林(일광기조입림)하야. 必及於地故(필급어지고)로 靑苔亦受照也(청태역수조야)라. 曰復照者(왈부조자)는 意謂深林(의위심림)이 原非照臨之地(원비조림지지)니 誰知斜陽透入(수지사양투입)이리오. 且復照靑苔之在深林下者(차부조청태지재심림하자)나 然(연)이나 返景(반경)이 倏忽已過(숙홀이과)하야. 寂寂空林(적적공림)이 除靑苔(제청태)면 亦更無別物(역갱무별물)이니 可不謂空山歟(가불위공산여)아?

푸른 이끼가 땅에 있어서 햇빛이 숲에 들어와 비치므로 반드시 땅에까지 미치므로 푸른 이끼역시 빛을 받는다. 復照(부조)라고 말한 것은 뜻이 숲이 깊어 원래 빛이 땅에까지 이르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니 누가 사양이 뚫고 들어옴을 알겠는가? 또 깊은 숲속에 있는 푸른 이끼를 다시 비추지만 그러나 석양빛이 문득 홀연히 이미 지나쳐서 적적한 빈 숲이 푸른 이끼를 제외하면 또다시 다른 물건이 없으니 빈산이라고 말하지 못할 것이겠는가?


* 鹿柴(녹채) : 왕유의 별업이 있던 망천(輞川, 현재 섬서성 남전현)에 있던 승경지의 하나. 장작나무 같은 목책이 둘러 있던 곳이다.

* 返景(반경):석양이 반사하여 비추는 모습(夕陽返照)

* 王維(왕유) : 자 마힐(摩詰). 산시성[山西省] 출생. 9세에 이미 시를 썼으며, 서(書)와 음곡(音曲)에도 재주가 뛰어났다. 아우인 진(縉)과 함께 일찍부터 문명(文名)이 높았으며, 특히 기왕(岐王)의 사랑을 받아 731년 진사에 합격, 태악승(太樂丞)이 되었다. 후에 제주(濟州:山東省 荏平縣)의 사창참군(司倉參軍)으로 좌천되었으나, 734년 우습유(右拾遺)로 발탁되어 감찰어사 ·좌보궐(左補闕) ·고부낭중(庫部郞中)을 역임, 이부낭중에서 급사중(給事中)이 되었다. 안녹산의 난을 당하여 반란군의 포로가 되어 협박을 받고 할 수 없이 출사하였다. 반란 평정 후 그 죄가 문책되었으나 아우 진의 조력과 반란군 진중에서 지은 천자를 그리는 시가 인정받아 가벼운 벌로 치죄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후 다시 등용되어 상서우승(尙書右丞)의 자리까지 벼슬이 올라갔다. 그 때문에 왕우승이라고도 불렸다. 또한 왕유는 육조시대(六朝時代)의 궁정시인의 전통을 계승한 시인이라 하여 장안(長安) 귀족사회에서는 칭찬이 자자하였고 존경도 받았다. 그의 시는 산수 ·자연의 청아한 정취를 노래한 것으로 수작(秀作)이 많은데, 특히 남전(藍田:陝西省 長安 동남의 縣)의 별장 망천장(輞川莊)에서의 일련의 작품이 유명하다. 맹호연(孟浩然) ·위응물(韋應物) ·유종원(柳宗元)과 함께 왕맹위유(王孟韋柳)로 병칭되어 당대 자연시인의 대표로 일컬어진다. 또 그는 경건한 불교도이기도 해서, 그의 시 속에는 불교사상의 영향을 찾아볼 수 있는 것도 하나의 특색이다. 《왕우승집》(28권) 등이 현존한다. 그림은 산수화에 뛰어나, 수묵(水墨)을 주체로 하였는데, 금벽휘영화(金碧輝映畵)에도 손을 대고 있어 화풍 또한 다양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순정 ·고결한 성격의 소유자로, 탁세(濁世)를 멀리하고 자연을 즐기는 태도 등은 남송문인화의 시조로 받들어지는 원인이 되었다. 송나라의 소동파(蘇東坡)는 “시 속에 그림이 있고, 그림 속에 시가 있다”고 평하였다. 당시는 장안(長安)에 있는 건축의 장벽산수화(牆壁山水畵)나 《창주도(滄州圖)》 《망천도(輞川圖)》 등이 알려져 있었으나 확실한 유품은 전하여진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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