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오늘의 종착지인 마네루에 도착했다. 공식적인 순례길로 29km를 걸은 것이다. 마네루(Maneru)는 지금은 아주 조그마하고 조용한 마을이지만 옛날 고대 로마인들이 정착했던 마을이다. 특이한 대부분은 집 대문마다 붙어있는 가문의 문장(紋章)들이 이 마을의 전통스러우면서도 고상한 성격을 드러낸다. 마네루에서는 이 지역에서 생산되는 특별한 로즈 와인을 맛볼 수 있다. 이 마을의 전통 수프도 맛볼 수 있다. 마을을 벗어나면 넓은 포도밭과 양 떼를 모는 목동이 등장하는 근사한 풍경이 순례객들을 맞이한다.
이 마을의 언덕 위에 외롭게 서있는 산타 바르바라 성당이 있다. 내일 아침 마녜루에서 나가는 순례길은 에스뻬란사의 수도원과 포르소사 수도원을 통해 이어진다. 조선 과객 금삿갓이 도착한 알베르게는 아주 조용했다. 순례객들은 대개 매일의 코스마다 약간 크고 번화한 마을이나 도시를 종착지로 선택한다. 그러는 게 훨씬 합리적이니까. 큰 마을에는 마켓도 있고 각종 편의 시설이 좀 더 잘 갖추어져 있으니 편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선 과객 금삿갓은 오히려 이런 한적한 시골 마을이 마음 편하다. 젊은 순례객들 부쩍거리지 않고 특히 서양 여성 순례객들이 적어서 좋다. 이들은 옷을 제대로 갖추어 입지 않아서 한 방에서 숙식하기가 여간 민망한 게 아니다. 오늘은 좀 무리를 해서 큰 마을이었던 뿌엔테 라 레이나의 유혹을 뿌리치고 더 걸어와서 조그마한 촌 마을 주막에 묵는 김삿갓 선배 처지이다.
그러나 우연히 찾아든 주막인 알베르게 주인아주머니의 넉넉한 표정과 집안 곳곳에 설치된 조형물들이 제법 유서가 깊어 보인다. 현관 옆에 선 철갑 기사상이 반기고, 포도주를 짜는 오래된 압착기와 술통들이 조선 과객 술꾼의 DNA를 자극했다. 뭔가 술맛이 좋을 것 같았다. 포도 산지답게 정원에서 자라는 포도도 알들이 잘 영글고 있었다. 우선 순례객들이 많지 않아서 좋고, 특히 젊은 순례객이 별로 없고 약간 나이 든 부부 순례객이 같이 있어서 마음에 들었다. 맛있는 와인과 저녁을 포함하여 1인당 26유로에 피곤한 몸이 호사를 누렸다.
넉넉한 인심의 모습을 띤 주인아주머니랑 포즈도 취해본다.
저녁 만찬은 조촐하게 세 커플이 즐기게 되었다. 은근히 로즈와인의 상큼한 맛을 기대하며 허기진 배에서 쪼르륵하는 소리가 나도록 참고 있었다. 드디어 식사 시간이다. 군대생활할 때도 식사시간에는 모두가 용감한 병사다. 일착(一着)으로 레스토랑에 도착하려고 갔는데 조선 과객 선비의 발걸음이 한발 늦었다. 서양의 기사(騎士) 양반들이 선점해 버렸다. 역시 조선 선비는 거드름을 피우면서 어슬렁어슬렁 걸어야 제맛 아니겠나. 서양 기사들처럼 파랑개비 돌듯 촐싹 되어서는 지체 있는 과객으로서 체통이 안 선다.
선비가 춥다고 곁불 쪼이거나 배 주린다고 바가지에 밥 담아 먹지는 못하지 않는가. 아무렇지 않은 척 내색 않고 앉아서 통성명을 하는 것이 조선의 법도이다. 일단 탐색전이 끝나니 대충 사이즈가 나온다. 한 부부는 아일랜드, 한 부부는 헝가리. 부부인지 길에서 눈 맞은 사이인지 아리송하다. 이 무튼 이들이 무알콜 스타일이어서 너무 행복했다. 주로 알베르게에서 무료 와인의 제공량은 2~3인에 한 병이다. 그런데 2명이 무알콜이니 정말 술 고픈 금삿갓에게는 희소식이다. 그래도 건배는 물로 하면 3년 재수 없다고 조선의 음주 법도를 설명하고, '위하여'를 가르쳐서 힘껏 외치게 했다. 덕분에 오래간만에 공짜술이 목구멍을 약간 즐겁게 해 줬다. 길은 힘들어도 끝은 언제나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