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는 명비(왕소군)가 스스로 한 말을 읊은 것이다. 말과 몸은 비록 오랑캐 땅에 있지만 한 나라를 잊지 못하여 형용이 초췌하여, 슬픈 감상을 이기지 못하므로 호왕(선우)이 그 정경을 알고, 아내(왕소군)의 마음을 위로하고자 하여 음률과 악기를 모두 한나라 악부에서 전해왔다. 공후도 한나라의 음악 소리이므로, 아침에 와서 말 위에서 공후를 연주하니, 홀연히 그것을 듣기에 어슴프레 한나라 궁중에서 한가하던 때의 음악소리와 같으니라.
<저광희(儲光羲)> : 윤주(潤州) 연릉(延陵) 사람으로 당(唐) 나라 때의 관리이자 시인이다. 전원산수시파(田園山水詩派)의 대표적인 인물로 개원(開元) 14년(726)에 진사(進士) 출신이다. 벼슬은 풍익현위(馮翊縣尉), 전사수(轉汜水) 현위, 안선(安宣)현위, 하규(下邽) 현위, 태축(太祝), 감찰어사(監察禦史) 등을 역임했다. 후에 종남산(終南山)에 은거했다. 안사(安史)의 난(亂) 때에 적군에게 포로로 잡혀 강압으로 적군의 벼슬을 살다가 난이 평정되자, 영남(嶺南)으로 유배되었다. 저서로 《정론(正論)》, 《구경외소(九經外議疏)》가 있다. 또 근래에 《저광희집(儲光羲集)》이 출판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