뭍옷보다 물옷이 더 좋아지는 그날까지
“저... 오늘 처음 왔는데. 초급자는 레인은 어딘가요?”
오랜만에 입은 원피스 수영복이 어색해 가랑이 쪽 수영복 천을 아래로 수시로 내렸어 유교걸들을 위한 로우컷이었는데도 말이지.
수영복을 사려고 찾아보니 처음 듣는 브랜드들과 전문 용어들이 난무하는 새로운 세계더라고. 수경을 사려고 해도 패킹과 노패킹, 오리발도 롱핀, 숏핀, 수영복도 가슴선, 등 디자인, 컷을 골라야 한다니 뭐가 이렇게 많다냐.
십수 년 전엔 백화점에 가도 아레나와 레노마 정도만 있었던 것 같은데 요즘엔 나이키 스윔, 베럴, 펑키타, 졸린, 후그, 센티 등등... 처음 듣는 브랜드가 너무 많았어. 심지어 앞면 디자인은 같은데 뒷면의 끈 디자인을 골라야 하는 투머치 선택사항(센티의 스테디셀러인 블랙스완 디자인은 오픈백, 더블크로스백, 타이백, 브이백 네 가지!)으로 수영복 사기 전에 온라인 검색하다가 화가 나더라고.
뭣보다 수영복을 제대로 입어본 경험이 별로 없다 보니 내가 입을 수 있는 수영복과 디자인에 대한 구별이 안 됐어. 도저히 검색으로는 안될 것 같아 수영으로 날렵한 돼지가 되었다던 친구에게 자문을 구했더니 이런 대답을 하더군.
“수영의 끝은 하이컷이야. 돈 아끼려면 처음부터 하이컷이다. 내 몸매도 다 하이컷입어”
순간 나는 바다코끼리 같은 내 친구가 하이컷 수영복을 입고 날쌔게 다이빙하는 모습을 상상했어. 친구는 가끔 채팅방에 오늘 입을 수영복과 수경, 수모를 찍은 사진을 올리곤 했는데(일명 수영코디 사진) 수영복이 스무 개쯤 된다고 했어.
‘친구야 너... 멋있다!’
하이컷이라는 이름이 불안해 검색해 봤더니 이미지 속 외국 여인이 컷이 매우 High~한 앞 뒤가 야박한 천 쪼가리를 입고 있었지. 양쪽 치골까지 치켜 올라간 과감한 컷. 마치 수영복을 입혀놓고 누군가가 위로 한 껏 끌어올린 것 같은 모양이었어.
'와우, 예쁜데 야하다. 근데 사타구니 모양이 보이는 것 같은데 한국인들도 원래 이런 거 입었었나.'
생각해 보니 최근 몇 년 간 방문했던 수영장이나 워터파크에서는 가족단위 나들이를 온 래시가드와 워터레깅스를 입은 어머님들 뿐이었어. 자외선을 싫어하고 편한 것을 좋아하는 한국인들에게 래시가드는 이제 수영복을 대체하는 의복으로 자리 잡은 거 같아.
하지만 래시가드 세트를 입은 사람들, 그들은 뭔가 수영장에서 수영을 하기보다는 튜브를 탄 아이들을 돌보거나 10초 내외의 잠수를 하는 그 이상의 물놀이는 하지 않았던 것 같아. 나의 사고체계는 수영복을 입은 자가 진정한 수영인이라는 편견으로 작동하고 있었어. 게다가 하이컷이라면.. 진정한 마스터즈반 수영인의 느낌이다.
수영을 계속하다 보면 하체 움직임이 편하다고 일부러 하이컷을 입는다는데, 초심자인 나에게는 하이컷이 벌칙 같았어. 그리고 하이컷은 제모를 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입을 수 없어 보였어. 나중에 수영카페에 가입해 보니 컷이 높은 수영복을 입을 때 제모하지 않고 수납(?)해 입는다는 분들도 있던데 그게 가능한 것인지 아직도 의문이야.
도저히 온라인으로는 견적이 안 나와서 백화점에 가 구매한 나이키 스윔의 네이비색 수영복. 무난해서 한편으로는 어디선가 본 듯한 수구 종목 실업팀의 단체 수영복 같은 느낌이었어.(수모를 태극기 모양으로 쓰면 더욱 그럴 듯) 최대한 눈에 띄지 않는 걸로, 가슴선 높고 엉덩이를 푸근하게 감싸주는 로우컷으로 골랐어. 로우컷은 입으면 매무새를 염려할 필요 없어서 편한데 뒷모습에는 전혀 날렵함을 느낄 수 없는 약간의 기저귀 핏이긴 해.
근데 뭐 어때. 편한 게 최고다라는 마인드에서 나이키 패스트 백 디자인은 나에게 최선이었어.
탄탄이라고 불리는 두 겹으로 된 수영복의 첫 시착이라 요령 없이 젖은 수영복에 몸을 밀어 넣는데 둘둘 말린 수영복은 왜 이렇게 질긴 거야. 끙끙거리던 찰나에 낯선 손길이 내 수영복 등 쪽 끈을 잡더니 쑤욱 위로 끌어올려 나에게 수영복을 입혀줬어. 깜짝 놀라 뒤를 돌아봤더니 샤워 순서를 기다리던 할머니가 앞에서 끙끙거리던 내가 너무 답답했나 봐. 빨리 입고 나가라는 표정의 시크한 할머니의 손길에 처음에는 당황했는데, 그 후에도 가끔 굼뜨게 수영복을 입고 있으면 나에게 꼬인 수영복 어깨끈을 풀어주거나 위로 당겨주던 도와주는 보이지 않는 손들이 있었어. 당황스러웠지만 고인 물 회원님들의 수영 문화인가 싶어서 허허 웃으며 받아들였어.
드디어 수영복을 입고 머뭇 거리며 수영장으로 입장했는데 이상하다 강사분들이 다 옷을 입고 있네?
레인은 여섯 개. 강사는 단 두 분.
이곳의 저렴한 강습료의 이유는 강사분들의 비 입수 강습 때문이었어.
*사진출처: 졸린, 나이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