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소서 쓰기는 너무 재미가 없다
필요한 글이면 써야 하는데 필요해도 잘 써지지 않는 글이 있다.
그 글이 나에게는 '자기소개서(이하 '자소서')'다.
그간 몇 군데 이력서를 넣으면서 자소서는 생략해 버렸다.
몇 줄이라도 써서 성의를 보여야 한다는 생각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머릿속에 떠오르는 말이라곤 '우리 천천히 알아가요'가 전부였다.
결혼이나 육아 이슈 없이 산 미혼인지라
중간중간 쉰 적은 있어도 경력단절이라 할 만큼은 아니어서
쓰자고 들면 쓸 만한 게 없는 건 아니었다.
자기 PR을 차마 못할 만큼 특별히 겸손한 성격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나는 자소서를 못 쓰고 있었다.
핑계 없는 무덤 없다고 이유 없이 그런 것 같진 않고
다음과 같은 이유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 같았다.
1. 너무 잘 쓰려고 해서
2. 이력서에 기재된 학력, 경력 사항만으로도 나란 인간을
쓸지 말지에 대한 판단은 충분할 것 같아서
3. 이력서를 내보긴 하는데, 구인사이트에 올라온 회사 정보만으론
(사측이 입사지원자를 놓고 긴가민가하는 것처럼) 나 역시 '꼭 이 회사여야 한다'는 확신이 없어서
4. 떨어지면 '나이' 때문이겠지, 자소서 때문이겠냐는 안일한 생각으로
5. 이 나이에 취준생인 20대 조카와 똑같은 신세라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6. 돈은 벌어야 하는데, 일은 하기 싫은 무의식의 반영
7. 실은 나도 날 잘 몰라서..(어쩌면 이게 가장 정확한 답일지도..)
나는 요즘 자소서로 고민하며 (다소 부정적 의미로) '40대는 두 번째 20대'라는 말을 실감하고 있는 중이다.
진짜로 다시 20대가 된다면 몰라도, 20대처럼 살아야 하는 40대는 별로인 것 같다.
40대에 자소서 쓰지 말란 법은 없지만, 예전 내가 꿈꿨던 40대는 자소서 쓰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불과 며칠사이에 자소서에 대한 내 태도가 바뀌긴 했다.
'안 써지면 어쩔 수 없지'에서 '그래도 어떻게든 써봐야지'로.
입사 지원한 몇 군데에서 다 연락이 없기 때문이었다.
적잖은 나이 때문이라고 한다면 더더욱 자소서를 통해
왜 젊디 젊은 지원자들을 두고 굳이 나를 뽑아야 하는지를 어필했어야 했다.
이런 후회엔 브런치 글을 읽다가 몇 줄의 글에 마음이 동해 구독을 누른 경험과 무관하지 않았다.
나는 이번 주중 하루를 자소서 쓰는 데 할애하기로 마음먹었다.
마음먹은 날이 아직 오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쓰기 싫긴 하다.
문득 같은 처지에 있는 취준생 이대남(20대 남) 조카가 생각나
조카한테 전화를 걸어 "넌 자소서 쓰는 거 어때?" 하고 물었다.
조카로부터 "저는 30분이면 쓰는데요."라는 답이 돌아왔다.
"어떻게 썼는데?" 하고 물으니 좀 전의 대답처럼 쿨하게 자기가 쓴 자소서도 보여주는 조카였다.
뽑으시려거든 저를 뽑으셔야 합니다.
(중략)
저를 믿어달라고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믿음이란 것은 불확실성 때문에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실력이란 결국 열심히 일을 하면서 점차 커지게 될 것입니다.
저는 성실하게 열심히 일할 것이 확실하니 굳이 믿을 것 없이
불러주시면 즉각 달려가겠습니다.
첫 줄부터 웃기더니 불러주시면 즉각 달려가겠다는 마지막 말에도 웃음이 나왔다.
나의 이런 반응도 모르고, 조카는 사뭇 진지하게 내게 조언까지 건네려 하고 있었다.
"이모가 자소서에 어려움을 겪는 건 너무 꾸미려고 해서 그런 거 아닐까요?
꾸미려고 들면 어려운데, 날 것 그대로 쓰면 겁나 쉬워요."
나는 속으로 말했다.
'그럴까? 정말 꾸미지 않은.. 날 것 그대로의 나여도...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