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하는 연봉을 맞춰주겠다는 전화 한 통

나는 앞으로 바쁠 예정인데, 어디서 바빠야 할까?

by 춘림

7월 중 취업을 목표로 하고 있었는데, 미친 더위로 구직활동을 쉬다 보니

계속 백수 상태로 8월이 코앞.

시기적인 이유로 나는 자연스럽게 구직이 되었다.

자영업자인 큰언니가 8월 중순부터 자기 가게 일을 같이 해보자고 제안했기 때문이다.

연중 언니 가게 일이 가장 바쁠 때가 명절 대목 전 한두 달.

올 추석이 10월 초인지라 나는 그 시기(8,9월)에 진입한 셈이다.


언니 가게 일은 단순 아르바이트가 아니다.

언니와 나는 올 추석선물용으로 상품을 얼마나 만들 것인지부터

포장은 어떻게 할 것인지, 홍보는 또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아이디어를 나눴다.

언니 가게를 함께 ‘가족 사업’으로 키워보자는 꿈도 나눴다.

우리는 함께 유튜브에서 자영업 성공 사례를 보며

“우리도 저렇게 대박나는 거 아니야?” 하며 깔깔깔 웃기도 했다.

그런데 그 타이밍에 전화가 온 것이다.


“요즘 뭐 해? 일 해야지.”

내게 전화를 걸어 이렇게 말한 사람은

예전 내가 프리랜서로 일했던 A회사의 이사였다.

한참 여기저기 이력서를 돌리던 한 달 전, A회사에도 이력서를 제출했었다.

그곳은 전전 직장에서 함께 일했던 지인(=이사)이 있는 회사였다.

예전엔 지인 추천으로 그곳 일을 했지만, 한 달 전엔 정식 입사를 위해 서류를 낸 터였다.

결과적으론 잘 되지 않았다.

그때 내가 제시한 연봉이 다소 높았던 모양이다.

조정을 제안 받았고, 나는 잠시 흔들렸다. 연봉을 낮춰서라도 들어가고 싶었으니까.

하지만 곧 생각이 바뀌었다.

폭염이 계속됐다. 숨이 턱턱 막히는 더위였다.

그런 날, 다시 서울살이를 시작하자니 날씨와는 반대로 의욕이 식어버렸다.

A회사는 재택이 안 되고, 반드시 출근을 해야 했다. 다시 살고 있는 집을 떠나야 했다.

나는 이사에게 조심스럽게 문자를 보냈다.

“서울 상근 하려면 제가 말씀드린 연봉이라야 생활이 될 것 같아요.

그러자면 또 회사에선 부담일 테니, 나중에 여기에서도 할 만한 일이 있을 때 연락 주세요.”

이사는 아쉬움을 표하며 알겠다고 했다.

그리고 한 달쯤 흐른 오늘, 내게 전화해

연봉을 맞춰주겠다고, 서울로 오라고, 말하는 것이다.


“전에 구직 사이트 보니까 A회사 지원자 많던데, 아직 사람 못 뽑으신 거예요?”

내가 묻자, 이사가 말했다.

지원자는 많았다고. 그런데 그중 몇몇은 실업급여 수급 조건을 채우기 위한

‘가짜 지원’이었고, 어떤 이는 너무 나이가 많았고,

어떤 이는 제시한 연봉이 회사 예산을 한참 넘겼다고 말이다.

결국 여러 사람을 검토하다가 “그래도 같이 일해 본 네가 낫겠다”는 결론에 도달한 모양이었다.

어쨌든, 지방에 있고 나이 좀 있다는 이유로 세상이 나를 밀어내는 것만 같았는데,

그래도 내가 다시 필요한 사람이 된 것 같아 기분은 좋았다.

하지만 좋은 기분은 오래가지 않았다.

문제는 출근 일이었다.


9월.

나 없는 9월은 언니에게 재앙이 될 수도 있었다.

다른 알바 뽑으면 되지,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게 또 그리 쉽지가 않다.

그런데 A회사도 10~11월이 가장 바쁠 때라

9월엔 무조건 출근해서 그 시기를 준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입사 제안이 한 달 전, 아니 보름 전에만 있었더라도

나는 이렇게 고민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때만 해도 언니 가게 일을 진지하게 생각하진 않았으니까.


나는 갑자기 생긴 두 가지 선택지를 놓고 각각의 장단점을 따져보았다.


A회사에 입사하면 안정적인 수입과 사회적 소속감을 되찾을 수 있다.

또래들과 일하며 느끼는 리듬과 활기도.

하지만 다시 방을 구하고, 적응하고, 사람 많은 전철을 견뎌야 하는 숙제가 있다.

관계와 일에서 오는 스트레스도 견뎌야 한다.

그런데 나는, 오래 견디는 데에 소질 없는 사람이다.

성실하게 일하면서도, 마음 한편엔 늘

‘이 삶이 정말 내 삶일까?’라는 문장을 달고 사는 사람인데…

과연 다시 잘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언니의 가게는 월급이 불확실하다.

장사 잘 되면 많이 주고, 잘 안 되면 다시 백수가 될 수도 있다.

대신 가족이 있다. 엄마가 있고, 강아지가 있고, 언니가 있다.

물리적으로 더 힘들어도 정신적으론 훨씬 편안하다.

몸은 힘들어도, ‘함께 키워보자’는 마음이, 일에서 오는 고됨의 결을 다르게 만든다.

엄마 곁을 지킬 수 있고, 봄이와 저녁 산책을 계속할 수 있다는 게 가장 큰 메리트다.

하지만 언니의 가게에 남는다면 불확실한 미래를 감당해야 한다.


좋은 제안이란 것도 타이밍이다.

타이밍이 안 맞을 땐 골머리를 앓게 된다.

모든 것이 정지된 듯 보이는 한여름 백수의 방 안에서

두 가지의 삶이 시뮬레이션되고 있다.

그 끝에 남은 질문은 다시 처음의 질문이다.


“나는 앞으로 바쁠 예정인데, 도대체 어디서 바빠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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