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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부. 기종이가 사는 마을

침묵의 산자락 아래, 한 사람의 세월이 흐르고 있었다

by 최국만


5부

기종이의 마을, 연풍면 요동리


괴산군 연풍면 요동리.

이 마을은 사계절 내내 산의 품에 안겨 있다.

사방이 완만한 산줄기로 둘러싸여 있어,

들보다 과수원이 더 많은 곳이다.


요동마을은 연풍에서도 사과농사를 가장 많이 짓는 마을이다.

봄이면 사과꽃이 눈처럼 피고,

가을이면 붉게 물든 사과 열매들이 산등성이마다 매달린다.

대부분의 집들이 농사를 짓고 살아가며,

논은 거의 없다.

그만큼 이 마을의 흙은 산의 기운으로 살아간다.


기종이네 집은 요동마을에서도 가장 안쪽,

산자락이 끝나는 곳에 있다.

낡은 스레트 지붕의 단층집,

한눈에 봐도 오래된 세월의 흔적이 남아 있다.

벽은 몇 번 수리를 거쳤지만, 여전히 비바람의 자국이 선명하다.

마당엔 오래된 장독대가 있고,

봄마다 그 위로 사과꽃이 장관을 이룬다.


그 집은 작고 소박하지만,

기종이가 태어나고 자란,

그의 세상이 시작된 곳이다.

그는 그곳에서 자라며 사계절의 일을 배웠고,

흙과 햇살과 침묵 속에서 어른이 되었다


기종이의 어머니는 천안이 고향이다.

젊은 시절, 연풍으로 시집와

이 산 아래 작은 집에서 평생을 살았다.

농사일을 하며 두 아들을 키웠다.

첫째는기종이, 둘째는 말이 또렷한 동생이었다.


기종이 아버지는 경계선 정도의 지적장애가 있는 농부였는데

말년에는 삶에 무게에 지쳤는지

술로 세월을 보냈다고 한다

그리고 지난 4년 전 돌아 가셨다.


기종이는 고등학교를 마치고

어머니 곁에서 농사일을 도왔다.

사과를 따고, 콩을 털고, 비닐하우스를 정리하며

농촌의 손과 어깨로 살아왔다


요동마을에는 작은 교회가 하나 있다.

주일이면 교회 차가 산길을 따라 올라와

노인들을 태워 간다.

하지만 자리가 모자라면,

기종이는 늘 걸어서 교회에 간다.

그는 묵묵히 길을 걸으며,

손을 모으고 예배당의 맨 뒷자리에 앉는다.


그를 아는 마을 어르신들은 나를 볼 때마다

“기종이를 잘 좀 봐줘요” 하고 말한다.

그 말에는 단순한 부탁이 아니라,

어디선가 미안함이 섞여 있다.

그들은 알고 있다.

이 마을에서,기종이가 겪은 일을.

그날의 폭력과 그 뒤의 침묵을.

하지만 이제는 아무도 그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다.


40여 가구가 사는 이 작은 마을.

여기서 기종이는 40년 넘게

거의 같은 자리에 머물러 있다.

누구는 그를 불쌍하다고 하고,

누구는 그냥 ‘그런 애’라고 말한다.

그러나 아무도 묻지 않는다.

그가 왜 말을 멈췄는지,

그가 무엇을 느끼며 살아가는지.


그의 침묵은 방치된 세월의 결과이자,

한 사회의 무관심이 만든 긴 그림자다.

사과밭의 나무들이 매년 꽃을 피우듯

세월은 흘렀지만,

기종이의 마음속 시간은 그날 이후 멈춰 있다.


그리고 지금


나는 그 마을 언덕에서 종종 그 집을 내려다본다.

낡은 스레트 지붕 위로 햇빛이 내려앉고,

집 옆에 예쁜 꽃들이 바람에 하늘 거린다.

기종이는 여전히 그 집에 살고 있다.

말은 없지만,

그의 하루는 언제나 땅과 함께 흐르고 있다.


그를 둘러싼 요동마을은

어쩌면 한 사람의 삶이 묻어 있는

가장 조용한 다큐멘터리일지도 모른다.


다음 편 예고

6부. <기종이 2024년의 기록 >

지난 2024년 1년동안 기종이에게 일어난 정서적 성장,학습의 향상,독립의 시작,

그리고 기다림의 교육을 따뜻한 기록으로 담았다.


한 해의 변화가 한 사람의 인생을 어떻게 바꾸는지,그 빛나는 과정을 글로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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