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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부. 말없이 오가는 마음들

그는 한 마디도 하지 않지만,나는 매일 그에게 마음을 배운다

by 최국만

8부.

우리는 하루도 빠짐없이 만난다.

아침이면 나는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간다.


“기종아, 선생님 왔어.”

“우리, 오늘도 같이 걸어볼까?”


말은 오지 않는다.

하지만 그 아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내 눈을 바라본다.


그 눈빛은 말 대신,

믿음과 수용, 그리고 조용한 고마움이 담겨 있다.


그 아이는 여전히 말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이제 안다.

우리는 ‘말’보다 더 깊은 것으로 소통하고 있다는 것을


기종이는 내 질문에 대답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의 말이 허공에 닿지 않았다는 걸

나는 그 아이의 표정으로 안다.


글씨를 따라 쓸 때,

퍼즐을 맞출 때,

산에 올라 숨을 헐떡일 때—

나는 그 아이의 침묵 안에서 감정을 듣는다.


아프면 얼굴을 찡그리고,

기쁘면 눈매가 올라간다.

싫은 건 손끝으로 거부하고,

좋은 건 나를 따라 같은 행동을 반복한다.


이것이 그 아이의 언어다.


나는 그 언어를 배우고 있다.

느리고, 조용하고, 섬세한 그 언어를

매일매일, 내 마음의 속도를 늦추며 익히고 있다.


그날도 기종이와 퍼즐을 맞추고 있었다.

92조각 해양동물 시리즈.

이젠 도움 없이 10분 만에 완성하는 그 아이의 자랑거리다.


내가 칭찬을 하자

기종이는 처음엔 미소만 지었다.

그리고 그날,

작게, 아주 작게 박수를 쳤다.


그 손뼉 소리는

세상의 모든 언어보다 더 크고 명확한 응답이었다.


나는 그 순간 울컥했다.

“기종아, 너 정말 잘했어.”

그 말은 내 입에서 나왔지만,

사실은 그 아이가 나에게 건넨 말이었다.


사람들은 때때로 나에게 짓굿게 묻는다.

“말도 못하는 아이랑 하루 4시간씩 같이 있으면서 안 힘드세요?”


나는 웃으며 말한다.

“아뇨, 오히려…

그 아이가 저보다 더 많이 가르쳐줘요.”


말하지 않아도

서로를 느끼는 관계,

기다려주고, 눈을 바라보고,

작은 변화에 온 마음으로 반응하는 시간들.


그건 돌봄이 아니라

존재와 존재가 서로를 존중하며 살아내는 일이다.


기종이는 여전히 침묵 속에 있다.

하지만 나는 그 아이의 하루에서

고요한 진심을 듣고, 말보다 더 깊은 울림을 얻는다.


그리고 나는 매일

그 아이 곁에서 사람을 배운다.


나는 이제 그 아이의 몸짓과 눈빛, 침묵과 감정을

말보다 깊은 언어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나를 괴롭히는 생각이 있다.


“그 아이가 다시, 언젠가 한 마디 말을 꺼내게 될 수 있을까?”

“그때, 가장 먼저 어떤 말을 듣고 싶을까?”


그 질문은

내가 기종이에게서 배운 것과 아직 배우지 못한 것 사이에 놓인

가장 뜨거운 질문이다.


다음 편 예고

9부.

<기종이의 첫마디를 기다리며>

말은 끝나지 않았다,

언젠가 그의 입술이 열릴 날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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