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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mi Nov 18. 2018

피해자와 가해자의 경계가 무너지는 그 곳, 영주의 마음

영화 <영주> 에서 마주하는 어려운 문제들

 모호한 것 투성에다 순식간에 변하는 세상에서도 한번 형성되면 결코 쉽게 무너지지 않는 경계가 존재합니다. 피해와 가해의 구분이 그렇습니다. 특히 일어난 사건의 성격이 분명할수록 그 구분은 단순해지죠. 졸음운전을 하던 차에 치여 목숨을 잃은 영주(김향기)의 부모님은 피해자입니다. 그리고 어린 나이에 갑작스럽게 부모님을 여의고 남동생의 보호자가 되어버린 스무살 영주도 이 사건의 분명한 피해자죠. 영주는 소년원에 들어가게 될 남동생의 합의금을 위해 고모에게 사정하지만, 한번 어긋난 친척 관계는 소용이 없었습니다. 영주는 깊은 좌절 속에서 생각합니다. 그들의 맞은편에는 역시 명백한 가해자 김상문(유재명)이 있습니다. 영주는 그의 주소지를 메모지에 옮겨 적고 집을 나섭니다. 어린 소녀의 눈은 분노와 원망으로 어둡게 빛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절대 용서할 수 없으리라고 생각했던 이를 용서해본 적 있나요? 누군가를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는 선언은, 내가 느끼는 극한의 분노와 증오가 응축될 때 가능합니다. 단순히 실망스럽다거나 미운 감정과는 비교될 수 없는 강렬한 강도가 거기에 있습니다. 흔히 우리는 누군가를 용서할 때 이해가 선행해야 한다고 말하죠. 그러나 당시의 모든 상황을 참작하고 그 사람의 입장과 마음을 완전히 알게 되었다고 할지라도, 강렬한 원망은 쉽게 방향을 틀지 않습니다. 이해는 용서의 충분조건이 아닌 셈이죠. 영화 <영주>는 피해와 가해의 경계에서 용서의 의미를 새롭게 생각해보게 합니다. 아니, 그 경계를 허무는 힘으로 용서만이 있는게 아니라는 깨달음을 갖게 해줍니다. 그 새로운 힘을 저는 조금의 용기를 담아 사랑, 이라고 불러보겠습니다. 





미묘하고 섬세한 감정들을 살린 배우들의 연기는 최고. 망설이고 주저하는 인물을 포착하는 순간이 많다. 그만큼 어려운 주제에 신중하게 접근하겠다는 감독의 태도일 것이다.




 영주는 겨우 스무살입니다. 부모님이 남기고 간 집에서 아르바이트로 일당을 벌며 근근이 살아가죠. 퉁명스럽고 사고를 치는 사춘기 남동생의 보호자이기도 합니다. 자꾸만 살고 있는 집을 팔라며 간섭을 하는 고모 내외에게 ‘저 이제 아이 아니예요, 어른이예요’라고 당돌하게 대답하지만, 그녀가 실제로 할 수 있는 어른의 역할은 거의 없습니다. 오히려 어른이어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그녀가 누려도 마땅한 애정과 보호를 포기하게 됩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녀를 그런 가혹한 운명에 빠트린 가해자가 영주가 포기해왔던 일상의 온기를 건네줍니다. 아낌없이 사랑하고, 조건 없이 도와주며, 오래 전 잃은 가족의 느낌을 그녀에게 선사하죠. 영주는 낯선 기쁨 속에서 혼란스러워합니다. 그들이 부모님을 죽였다는 사실은 변함없지만, 그들이 지금 그녀에게 좋은 사람들이라는 사실 역시 분명하기 때문이죠. 


 남동생은 영주가 일하는 가게의 사장이 가해자라는 사실을 알고 어떻게 그 사람들의 얼굴을 매일 볼 수 있는지 그녀를 다그칩니다. 죽은 부모님께 미안하지도 않느냐고요. 영주는 대답합니다. 부모님은 자신에게 모든 짐을 남겨놓고 갑자기 죽어버렸지만, 이분들은 지금의 나를 좋아해주고 나 또한 좋아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요. 부모를 향해 ‘그렇게 죽어버리면 그만이야? 나한테 해준 게 뭔데?’라고 말하는 그녀의 말에서 피해와 가해, 피해자와 가해자의 경계는 이미 무너져있죠. 사고가 났던 그맘때쯤 술에 만취해 미안하다는 말을 되풀이하는 상문, 코마상태에 빠진 아들을 자신의 업보라고 여기는 상문, 죄책감으로 흐느끼며 기도하는 상문의 아내(김호정)까지. 졸음운전으로 인한 사고라는 죄는 엄연한 사실이지만, 어떤 위치에서 어떤 세상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피해와 가해의 문제는 복잡해진다는 것. 때론 그 이분법이 무의미하게 느껴질 정도로 실제 우리의 삶과 관계는 심오하고 섬세합니다. 영주의 흔들리는 눈빛, 떨리는 목소리, 망설이는 단어들은 이 낯선 상황에 놓은 혼란스러움, 그 자체입니다. 


 그리고 더 곤란한 문제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과연 상문 부부 내외는 영주가 피해자의 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여전히 그녀를 딸처럼 사랑해줄 수 있을까요? 영주는 이해나 용서를 넘어선 사랑을 할 수 있었지만, 그들은 죄책감과 수치심을 넘어서 사랑을 할 수 있을까요? 저는 피해자의 용서의 문제를 이야기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질문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영화가 이 문제에 다가가기 시작하면서 가슴은 더욱 아파옵니다. 서로가 진심으로 서로를 좋아하고 있지만, 피해자와 가해자라는 위치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되니까요.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어째서 그렇게 고통스럽고 절절하게 느껴졌는지 자세히 적지 않은 이유는 더 많은 분들이 직접 영화를 보았으면 하는 마음 때문입니다. 누구도 명쾌하게 답을 내려주지 않은, 복잡하고 혼란스런 고민의 한가운데를 걷는 영주를, 주저 앉았다 다시 일어나 걷는 영주의 뒷모습을 저는 끝까지 바라보았습니다. 그 고민을 잊지 않고 계속 함께 걷겠다고 다짐하면서요. 




공식 포스터. 영화 <영주>는 11월 22일 개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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