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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mi Sep 17. 2018

그들의 목소리를 들어야하는 이유 (2)

DMZ국제다큐영화제, 클로드 란츠만의 <네 자매> 를 보고

 다큐멘터리가 담은 충격적이고 비극적인 증언들을 모두 옮기는 일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누군가는 반문하겠죠. 우리 눈 앞에 닥쳐있는 시급한 문제들로도 벅찬 오늘, 이미 지나간 역사의 증언을 듣는 것이 꼭 필요한 일이냐고요. 그 질문에 대한 답을, ‘히포크라테스 선언’의 증언자인 루스의 이야기를 빌어 답하려고 합니다. 


 체코슬로바키아에서 태어난 루스는 가족과 수용소로 이송되었을 때 17살이었습니다. 같은 수용소에 수용된 남자친구와 수용소 의무실에서 결혼을 하고 (옆 침대 환자의 반지를 빌리고 랍비의 부부 선언을 듣는 것만으로 충분했죠) 운좋게 가족실에 배정되어 임신까지 했지요. 하지만 추위와 배고픔, 혹독한 노동과 최악의 위생상태인 수용소에서 뱃속의 아기를 지켜내기란 위태로운 일이었습니다. 게다가 임신한 여성은 노동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수용소에서 살아남기도 불리했죠. 그녀는 살아남기 위해, 그리고 아기를 낳기 위해 고군분투를 합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옮겨져 바로 옆 막사의 가족들이 가스실로 들어갈 때까지도 그녀는 부푼 배를 안고 생을 꿈꿨죠. 


'히포크라테스 선언'의 루스. 그녀는 인터뷰 중 수용소에서 불렀던 체코 노래들을 아코디언을 연주와 함께 들려줍니다. 





 마침내 루스는 수용소 의무실의 난로 가까이서 딸을 낳았습니다. 그러나 아이를 지키지 못했습니다. 그녀를 예의주시하던 수용소 총감독의 명령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녀가 아이에게 수유하는 것을 금지한 후, 아이가 먹지 않고 얼마나 버틸 수 있는지 실험하겠다고 선언합니다. 그녀와 아이의 죽음이 예정된 전날 밤, 의무실의 여의사는 아이의 생명을 포기하는 대신 그녀가 살 수 있게끔 구원합니다. 그녀를 설득하기 위해 말했던 ‘히포크라테스 선언’이 이 파트의 제목이 되기도 했지요. 루스는 여의사의 도움으로 살아납니다. 살아 남아 수용소에서 나오고 이후 이스라엘에 정착하게 됩니다. 


 루스는 이스라엘에서 새로운 가족을 만듭니다. 그러면서 첫째 아들을 낳을 때 이야기를 들려주지요. 그녀는 병원의 수술실에서 의사와 간호사의 도움으로 아기를 낳습니다. 아기의 탯줄을 자르고 의사와 간호사들이 아기를 그녀의 곁에서 떨어트리자 그녀는 발악했습니다. 




 내 아기를 돌려줘! 당신들은 내 아기를 죽이려고 데려가는 거잖아!
절대 내게서 빼앗아 가지마, 내 아기를 돌려줘! *



 힘든 진통 때문에 제정신이 아닌 까닭도 있었겠지만, 그녀는 아우슈비츠에서의 경험을 잊을 수 없던 것입니다. 몇 년이 지나도, 평화로운 일상이 삶에 자리잡았음에도, 결코 과거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던 거지요. 하지만 그녀에 대해 모르는 의사와 간호사들은 무척 당황했지요. 의사는 그녀가 미쳤다고 생각하고 뺨을 때리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그들이 어떻게 알겠어요, 어떻게 나를 이해할 수 있겠어요. 수용소에 있던 내가 어떻게 망가졌는지, 내가 왜 이렇게 되어버렸는지. 거기에 없던, 그곳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이 어떻게 알 수 있겠어요.*

 


*여기서 인용한 다큐 증언은 기억에 의존하여 재구성한 것으로 다큐의 실제 언어와 정확하게 일치하지 않음을 밝힙니다. 실제 언어를 왜곡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녀는 그때서야 한번도 이야기한 적 없던 자신의 과거를 의사에게 털어놓게 됩니다. 의사는 그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아이를 그녀의 품 안에 돌려주죠. 저는 루스의 말이 무척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우리는 우리의 경험 안에 머물러 있는 존재들입니다. 우리의 과거가 현재 우리 세계의 전부이죠. 그렇기에 우리의 세계를 넓힐 수 있는 방법은 나의 경험 밖의 이야기를 듣는, 타인의 이야기를 듣는 일입니다. 특히 그것이 역사의 비극과 관련되어 있는 문제일 경우, 인간의 슬픔과 고통의 과거일 경우 더욱 중요합니다. 그것만이 우리 세계에 한정되어 있는 협소한 이해를 확장시킬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죠. 듣는 것만으로 모두 이해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적어도 듣는 노력을 그치지 않아야만, 비참이 줄어드는 더 나은 내일의 가능성이 열린다는 사실만은 분명하겠죠. 






 다큐멘터리를 보는 내내 참 많이도 울었던 것 같아요. 퉁퉁 부은 눈으로 상영관을 나와 여전히 어둡고 축축한 밤거리를 걸으며 다시금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떠올렸습니다. 방문이 허용된 첫 번째 수용소의 입구에는 George Santayana의 말이 새겨져 있습니다. 

 

 THOSE WHO DO NOT REMEMBER THE PAST 
 ARE CONDEMNED TO REPEAT IT.
 
-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자는 과거를 되풀이한다





*2017년,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다녀온 후 남겼던 글이예요. 궁금하시면 읽어보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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