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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mi Nov 17. 2019

사실적 진실과 감정적 진실

테드 창 동명의 소설로 생각하는 기억의 함의


 지난 ‘블랙미러 시리즈’를 소개하며 저는 기억의 매커니즘이 가진 왜곡을 이야기했었습니다. 카메라를 통해 저장된 객관적 과거와 개인의 의식 속에 선별되어 저장되는 주관적 기억의 간극은 큽니다. 그래서 기억의 왜곡과 불완전한 저장을 보완하는 영상 장치가 기억과 회상을 대체하는 미래가 공포스럽다고 고백했었지요. 그런데 최근 나온 테드 창의 소설집 (지난 글에서 테드 창의 ‘당신의 이야기’와 영화 ‘컨택트’를 함께 소개한 적도 있지요)<숨>을 읽다 이와 매우 유사한 근미래를 다룬 단편이 있어 놀랍기도 하고 반갑기도 했어요. (혹시 테드 창의 이 단편이 블랙미러 에피소드의 원작이었을까요? 이 두 개의 관계를 아시는 분이 있다면 알려주세요!) 단편의 제목은 <사실적 진실과 감정적 진실>입니다. 소설의 제목에서부터 이미 진실의 두 가지 측면을 구분하며 내용을 암시하고 있죠. 



 

'상인과 연금술사의 문', '숨' 등 총 9편의 단편이 수록된, 올해 최고의 SF 작품이라고 평가되는 책. SF를 특별히 선호하지 않는 저조차도 빠져들어 읽었어요.(출처:예스24)


 소설의 중심은 인간 의식에 이입되는 신종 검색툴 ‘리멤’의 역할입니다. 소설의 배경은 이미 신체에 개인 카메라를 장착하고 자신의 일상 전부를 촬영하여 저장하는 ‘라이프로그’의 사용이 보편화된 시대입니다. ‘리멤’은 ‘라이프로그’가 취약한 검색 기능을 대체하는 매커니즘으로, 말 또는 하위발성에 반응하여 이전에 기록된 영상을 검색해 자동 상연해줍니다. 우리의 기억과 회상 과정을 대체해주는 기술인 거죠. 소설의 주인공이자 화자는 신문기자로 리멤이 인간 삶에 초래할 부정적인 결과를 염려하며 심층기사를 쓰기 위해 취재를 합니다. 


 그는 리멤이 인간이 기억의 연화-과거 사건에 결부된 감정을 약화시키거나 사건 자체를 잊어버림으로써 그 기억이 현재의 자신에게 덜 영향을 미치게 만드는 것-를 불가능하게 할 것을 우려합니다. 기억이 부정확하며 오늘의 시점에서 다르게 각색될 수 있다는, 즉 왜곡의 가능성은 그에게 긍정적으로 평가됩니다. 각자에 의해 취사 선택된 기억의 지층은 한 사람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서사’입니다. 화자는 자신이 기억하는 할머니의 미소를 예를 들며, 이 장면을 의미있게 만드는 것은 할머니가 정말 자신에게 미소를 지었는지 확인할 수 있는 기록 영상이 아니라, 그 장면을 따뜻하게 기억하는 감정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리멤이 저장하고 불러오는 영상이 사실적 진실이라면, 그 자신이 당시 순간에, 그리고 그 이후에 간직하고 있는 느낌이 감정적 진실로 볼 수 있겠지요. 


자서전에서 진실이 수행하는 역할에 관해 문학 평론가인 로이 파스칼은 이렇게 썼다. “한편으로는 사실에 입각한 진실, 다른 편으로는 작가의 감정에 입각한 진실이 존재한다. 이 두 가지의 진실이 일치하는 지점은 그 어떤 외부의 권위에 의해서도 미리 결정될 수 없다.” 우리의 기억은 사적인 자서전의 집합이며, 나의 기억에 할머니와의 오후가 두드러지게 각인되어 있는 것은 그 기억과 결부된 나의 감정들 때문이다. (…) 내 어린 시절 전체를 연속적으로 찍은 동영상에는 사실들은 가득하겠지만, 감정은 없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카메라는 사건의 감정적 차원은 포착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 사람은 수많은 이야기로 이루어진 존재다. 기억이란 우리가 살아온 모든 순간들을 공평하게 축적해놓은 결과가 아니라, 우리가 애써 선별한 순간들을 조합해 만들어낸 서사이다. 설령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사건들을 경험하더라도 우리가 똑같은 이야기를 만들어내지 않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특정 순간들을 선별하는 기준은 각자 다르며, 그것은 우리의 인격을 반영하는 거울이다. 우리들 각자는 우리의 주의를 사로잡는 세부 사항들을 인식하고, 우리에게 중요한 것들을 기억하며, 그 결과 구축된 이야기들은 우리의 인격을 형성한다. 

(테드 창, 김상훈 역 『숨』, 2019, 엘리, pp.299-302)


 이 두 개념은 단편 속에서 교차되는 이야기 속 이야기, 티브족의 이야기와도 연관됩니다. 지징기라는 티브랜드의 샹게브 씨족의 원주민 소년은 선교사 모스비를 통해 글을 배우고 기록법을 학습합니다. 이에 따라 그의 사고체계도 문자의 법칙을 따라 형성되고 문자문화를 체득하게 되지요. 모스비가 원주민의 재판체계를 특이하다고 여기자, 지징기는 그들 문화에 공존하는 두 개의 개념 '미미'와 '보우'를 설명합니다.  


"우리 언어에는 당신 언어의 ‘사실’이라는 말에 해당하는 단어가 두 개 있습니다. 어떤 일이 옳을 때는 ‘미미’라고 하고, 정확할 때는 ‘보우’라고 합니다. 분쟁이 벌어지면 당사자들은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말합니다. ‘미미’를 말하는 거죠. 하지만 증인들은 정확히 사실 그대로를 말할 것을 선서하기 때문에 ‘보우’를 말합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들었을 때, 사베는 어떤 행동이 모두를 위한 ‘미미’인지 결정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당사자들이 ‘미미’를 말하는 한, 그들이 ‘보우’를 말하지 않는다 해도 그들은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테드 창, 김상훈 역 『숨』, 2019, 엘리, pp.306-307)



쓰고 싶은 이야기가 생길 때까지 쓰지 않는다는 테드 창. 그래서인지 두번째 작품집인 <숨>은 17년만에 출간되었습니다. (by. Ben Kirchner/The Newyorker)



 그러나 동시에 화자는 이혼 후 딸을 홀로 키워 온 아버지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결코 다정하게 지내왔다고 할 수 없는데, 특히 그는 딸과 심하게 다투며 그녀에게 들었던 공격적인 말들을 그는 지울 수 없는 상처처럼 안고 있습니다. 그러나 리멤의 성능을 실험해보는 도중 돌려본 과거의 장면에서 그는 가시돋힌 말을 했던 사람이 딸이 아니라 바로 그 자신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자기 멋대로 기억을 왜곡시켰던 거죠. 그 상처 위로 자신이 쌓아온 시간들이 기만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는 큰 충격에 빠지게 됩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그는 리멤의 기록이 명백한 사실을 위반하지 않도록 잡아줄 수 있는 기능을 할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이 소설은 <블랙미러> 에피소드와 비교해 교훈적으로 종결됩니다.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고 편의를 증대시키기 위한 기술의 발전은 계속 되고, 이를 거부할 수 없는 세계에 기술가 어떻게 조화를 이룰 것이냐가 문제가 됩니다. 화자는 디지털 기억의 핵심은 "당신이 옳았다는 점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틀렸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한 사람이 자신에 대해 미화되고 위선적인 네러티브를 구축하지 않기 위한 예방이 되어야 하는 것이죠. '감정적 진실'과 '사실적 진실'의 간극이 지나치게 멀어지지 않도록, 우리의 '미미'가 '보우'를 위반하지 않도록, 생산적인 진실에 복무하는 선에서 디지털 기록을 활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SF장르나 판타지 장르를 좋아하는 편은 아닙니다. 그런데도 테드 창의 작품을 좋아하는 까닭은 그가 단순히 유토피아나 디스토피아의 미래를 상상하는 데 그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는 과학기술과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을 현상학적으로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심층까지 파고 들어갑니다. 즉, 인간의 감각과 사고체계에 미치는 근본적인 변화를 사유하죠. (단편 속 이야기 지징가가 구어문화에서 문자문화로 바뀌면서 사고체계가 달라진 것처럼) 그래서 그의 작품 속에서는 과학과 철학의 세계가 펼쳐진 듯 느껴집니다. 그는 아직 낯설지만 완전히 새로운 접근으로 그 세계로의 초대장을 보내는 작가입니다. 이 단편의 결말은 다소 낙관적이고 훈훈해서, 기억의 왜곡과 진실이라는 복잡한 층위의 개념이 가진 긴장들을 여전히 해소시키지 못한 것 같습니다. 여전히 우리에겐 왜곡되고 억압된 기억들에 접근하는 힘겨운 목소리들과 그 목소리를 해석해야 하는 의무가 있으니까요. 




*테드 창의 또다른 이야기와 영화를 다룬 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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