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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mi Jan 04. 2019

당신의 말들은 처연한 아름다움입니다

-김숨의 일본군 위안부 증언집

세상 글자들 중에 나는 ‘나’가 좋아.
나가 없으면 다른 것들도 없으니까.
나가 없는데 다른 게 있을 수가 없지. 나가 없는데,
뭐가 있을 수가 없지.

이 생에는 나가 세 개나 되네.

일평생에 걸쳐 겪어도 숨찬 걸 열세 살에 다 겪었어.
열세 살 때 너는 뭐가 가장 갖고 싶었어?

나는 나 …….


*김숨, 『군인이 천사가 되기를 바란 적 있는가』(일본군 '위안부' 길원옥 증언집), 2018, 현대문학, p.8




 김복동 할머니는 열다섯, 길원옥 할머니는 열세 살이었습니다. 고향을 떠나는 기차 안에서, 배 위에서, 그들은 공장에서 일해 돈을 벌 수 있으리라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상대한 건 옷감이 아니라 군인이었습니다. 성에 대해선 아는 게 없었고 오후부터 밀려드는 군인들은 공포와 두려움의 존재였습니다. 폭력과 학대에 속수무책이었던 그들은 하루하루를 가까스로 버텨냈고, 폭력으로, 질병으로, 또는 스스로 목숨을 끊은 위안부 여성들의 시체를 묻어야 했습니다. 이제 아흔을 넘은 그녀들의 기억력은 희미합니다. 점심이면 아침에 먹은 음식을 기억하지 못하고, 가족의 이름도 헷갈립니다. 그러나 어떤 기억의 조각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녀들의 몸과 마음에는 여전히 강렬하게 남은 감정의 기억들이 있습니다. 잊고 싶어도 사라지지 않는 기억, 그것은 위안부의 시간입니다.


 작가 김숨은 이들의 증언을 소설화했습니다. 그러나 전작 『한 명』과는 결이 다릅니다. 소설 『한 명』도 위안부 할머니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쓰여졌지만, 증언의 말들은 작가가 창조해낸 소설의 세계 안에서 인용됩니다. 소설의 주인공은 모든 위안부 할머니들의 증언을 빌어 말하고, 동시에 증언들은 주인공에 의해 세계에 들려질 수 있게 됩니다. 이 소설에서 증언의 위치는 허구적 세계의 현실적 기반이자 재조명되는 사실이 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최근 나온 두 권의 증언집에서는 현실과 허구의 경계가 모호합니다. 증언하는 할머니가 소설의 주인공이고 그들의 증언이 소설의 세계를 구축해나갑니다. 증언이 서술하는 말들을 바탕으로 그들의 과거와 현재가 한편의 소설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중요해지는 것은 작가의 완전한 창작이 아니라 구성과 배치의 작업입니다. 그렇기에 이 증언집을 기존의 장르 규정에 따라 ‘소설’로 칭하는 것도 망설여집니다. 작가 또한 증언을 ‘소설이라는 그릇’에 담았다고 표현합니다. 소설이라는 양식을 활용해서 증언의 말을 담아내긴 했지만, 증언은 완전히 소설이 되었다고 할 수 없는 형태로 남아있는 것이죠.   





 증언집을 읽다 보면 그 안의 문장은 소설의 것이기보단 시의 것에 더 가깝게 느껴집니다. 문장과 문장 사이의 긴 여백, 제대로 완성되지 못하고 끝맺어지는 문장, 숱한 쉼표와 말줄임표로 멈췄다 이어지는 말들……. 한 문장, 한 문장은 간신히 세상에 나왔다는 걸 온몸으로 표현합니다. 과거 기억의 말은 완성되지 못한 채 불현듯 지금으로 돌아오고, 오늘을 이야기하다 불쑥 과거로 회귀하기도 합니다. 할머니들의 온전치 못한 기억, 그 기억에 의지해 과거를 들여다보는 일은 그만큼 혼란스럽고 어렵습니다. 특히 끔찍한 고통과 맞닿아있는 위안부의 기억은 그 기억을 떠올리고 말하려는 시도에서부터 증언자를 괴롭게 합니다. 그러나 할머니들은 그 고통의 혼돈 속에서도 증언합니다. 그 증언은 역사의 사료로써만이 아니라 인간의 용기와 의지를 상징합니다. 그리고 참혹한 역사에 대한 자각과 반성, 책임감으로 우리를 묶어주죠.    


 할머니의 말들이 가진 고통과 슬픔과 아름다움에 며칠 밤을 뒤척이면서 생각했습니다. 증언이 담겨지는 것이 시이든 소설이든 르포이든 형식은 그다지 중요한 게 아닐 거라고요. 그보다 우리가 귀 기울여야 하는 목소리를 듣고자 하는 시도, 그리고 그 목소리를 전달하고자 하는 노력이 더 중요한 것이겠죠. 정형화된 양식은 어쩌면 증언이 함의한 의미들을 가혹하게 잘라낼 지도 모릅니다. 사회 변방의, 소수의 목소리는 전달에 취약한 위치에 놓여있습니다. 말해지기도 들려지기도 더 어렵지요. 우리는 사회의 주류를 대변하는, ‘일반’의 목소리에 더 익숙해져 있으니까요. 그렇기 때문에 형식의 규범들을 뛰어넘어, 그들의 목소리를 제대로 담아내기 위한 창조적인 시도가 절실히 필요한 시대라고 생각됩니다. 김숨의 증언집은 그 시도의 반짝이는 결과일 거고요.


 권명아는 해설에서 김복동의 문장이 질문과 의문으로 채워져 있고, 기억하는 주체나 기억하는 내용이 계속해서 변형되어 드러나는 형태에서 ‘응답에 대한 간절함’을 봅니다. 그녀가 왜 그런 일을 겪어야 했는지, 평생 동안 홀로 골몰했던 물음에 대해, 그 말을 듣고 되돌려주어야 할 책임이 우리에게 남아있음을 설명하죠. 박혜진은 김숨의 소설이 증언하는 할머니와 듣는 독자의 역할 경계를 사라지게 만들고, 독자를 듣는 자이면서 기억하는 자이고 다시 말하는 자이게끔 한다는 데 주목합니다. 할머니에게서 우리로, 우리에게서 후대로 기억의 노래가 이어지는 것이 세계를 변화시키는 힘이 될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증언소설은 ‘그들의 과거’를 ‘우리의 기억’으로 만듭니다. 고통의 기억을 나눠가진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을 것입니다. 



아름답고 싶었어,
나를 잃고.
나무는 그냥 서 있기만 해도 아름다운데.

아름다워지고 싶을 때마다 죽은 얼굴에 화장(化粧)하는 것 같았어.
조금 있으면 땅속에 묻힐 얼굴에.

나는 사랑을 못 해봤어.
시시한 사랑 말고 죽고 못 사는 사랑. 

사랑이라는 말을 입에 담아본 적 없어, 일생을…….
(…) 
사랑은 내게 그 냄새도 맡아본 적 없는 과일이야.
빛깔도 본 적 없는.

그래서 너는 사랑을 알아?


*김숨, 『숭고함은 나를 들여다보는 거야』(일본군 '위안부' 김복동 증언집), 2018, 현대문학, p.6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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