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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mi Feb 16. 2019

커피 한잔이면 충분해요

교토-오사카 여행이야기 (3)

 저는 스무살까지도 커피는 입에 대지 않았어요. 중학교때 마셔본 아메리카노는 너무 썼고 마신 후엔 쿵쿵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처럼 심장이 격하게 뛰었거든요. 새벽까지 잠들지 못해 괴로워하며 어린 저는 다짐했더랍니다. 이 악마 같은 음료를 절대 마시지 않겠다고요. 그러나 누가 알았겠습니까. 십년도 채 되지 않아 그 여자애가 커피를 마시지 못하면 하루도 견디지 못하는 커피애호가가 될 줄 말이죠. 지금 그녀는 아침에 일어나 사과를 먹고 핸드드립으로 커피를 내립니다. 집 안에 은은하게 번지는 커피향을 사랑하고, 진하게 내린 모닝커피를 천천히 음미하는 시간을 행복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물론 이제 하루 에스프레소 4잔 정도는 거뜬하죠. 너무 늦은 시간에 마시지 않도록 주의만 한다면요. 


 제가 커피를 다시 생각하게 된 건 일본영화 <카모메 식당>을 통해서였습니다. 주인공인 사치에는 핀란드 헬싱키에서 작은 식당을 열지만 이렇다 할 특색이 없어 손님은 거의 없어요. 어느 날 그녀의 커피를 마신 손님이 더 맛있는 커피를 만들 수 있는 법을 알려준다며 핸드드립을 자청합니다. 여과지에 원두가루를 담고 뜨거운 물을 붓기 전에 그는 검지손가락을 올리고 주문을 외웁니다. ‘코피루왁’. 그녀가 어설프게 따라하자 그는 그 주문이 가슴에서 우러나와야 한다는 듯 심장께에 손을 가져다대죠. 주문이 걸린 커피는 정말 맛있었습니다. 그 후로 그녀는 잊지 않고 주문을 외우게 돼요. 한잔의 커피를 내리기 위해, 진심을 다해, 코피루왁.

 

'코피루왁' 주문을 가르쳐준 아저씨와 카모메 식당 주인 사치에. 영화 후반에 들어서 이 아저씨의 정체가 우스꽝스럽고도 짠하게 밝혀진다. (사진 출처:네이버영화)


 코피 루왁(Kopi Luwak)이 사향고양이똥인 고급 원두를 의미한다는 것은 한참 후에나 알게 되었지만(영화에서는 최고급 원두커피의 맛과 비슷해지라는 의도의 주문이 아니었을까 추측해볼 뿐입니다), 어쨌든 그 영화 때문에 커피에 매력을 느끼게 된 건 분명합니다. 정확하게는 드립 커피가 내려지기까지의 과정에 반했던 거예요. 원두를 가는 소리, 빳빳한 여과지를 펴 드리퍼에 낄 때 바스락거리는 종이소리, 고운 원두가루에 물이 스미는 소리, 드리퍼에서 커피가 한방울 두방울 떨어지는 소리……. 그 소리들이 태어나기까지의 시간과 소리가 들려지기 위해 필요한 고요함, 그리고 소리를 제대로 느끼기 위한 마음의 여유. 커피를 내리는 행위 자체가 이 모든 걸 아우른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그러자 쓰기만 한 커피가 음미하고 싶은 커피로 바뀌게 되더군요. 풍미만이 아니라 커피가 상징하는 느긋한 여유까지 들이마시고 싶었어요. 그렇게 만나게 되었습니다, 커피라는 세계와 저는. 


 교토와 오사카에 있는 동안 제가 갔던 카페들은 대부분 개인이 운영하는 작은 카페였습니다. 한정된 공간에는 꼭 필요한 것들만이 있어야 할 곳에 놓여있는 것 같았습니다. 곳곳에 주인의 취향과 스타일이 녹아있어 사적인 공간에 초대받은 느낌이었죠. 그런 카페에서 주인의 추천을 받아 커피를 선택하고 마시는 건 정말 특별했습니다. 오로지 저만을 위한, 유일무이한 선물을 받는 기분이었으니까요. ‘코피루왁’ 주문을 가르쳐준 그도 맛있어진 커피의 맛에 놀라는 사치에에게 이렇게 말했더랬죠. 남이 타준 커피가 제일 맛있는 법이라고. 저는 여행동안 매일 한잔 이상의 행복을 누렸습니다. 낯선 곳에서의 여행에서는 신경을 곤두세울 수 밖에 없는데, 여행자의 피곤과 긴장을 잊게 해주는 데 충분한 한잔이었어요. 한정된 시간 안에 더 많은 것을 해야한다는 욕심을 버리고 잠시 쉬어가는 시간이 필요한 건 일상에서나 여행에서나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오사카-교토를 거치며 마셨던 한잔의 행복들, 그 행복이 가능했던 아름다운 공간들.






*커피에 대한 사랑 고백을 듣고 싶다면 저의 지난 (짧은) 글이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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