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imi Jan 10. 2021

어떤 과거와 비로소 화해하는 겨울밤

겨울 영화 <윤희에게>



 겨울이 오면, 특히 눈이 오는 밤이면 생각나는 영화들이 있어요. <나만의 겨울 영화 리스트> 글에서 소개했던 <이터널선샤인>, <렛미인>, <캐롤>인데요, 이 목록에 영화 하나가 추가되었습니다. 간밤부터 쌓인 눈으로 창 밖은 새하얗게 빛나고 있네요. 이 환한 풍경을 바라보며 말하고 싶은 영화가 그것입니다. 2019년 겨울에 개봉한 <윤희에게>.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와 눈 덮인 풍경을 통과하는 기차를 따라 영화는 시작됩니다. 조카의 책상에 부치지 못한 편지를 우체통에 냅다 넣어버린 마사코 고모와 엄마에게 온 편지를 몰래 훔쳐 읽는 딸 새봄. 학창시절 헤어져야 했던 윤희와 준의 인연은 이들 주변인 덕분에 다시 이어져요. 고등학교 졸업을 앞둔 새봄은 엄마와의 여행을 추진하고 편지의 발신지인 일본의 오타루로 떠나옵니다. 그리고 마사코는 카페로 찾아와 준과 만나게 해달라는 새봄의 부탁을 들어주죠. 꿈에서만 간신히 서로를 보았던 윤희와 준은 어느 겨울날 아주 가까이 있게 됩니다.


 

 영화의 고요한 흐름은 주인공인 윤희의 차분함과 닮아있어요. 이혼한 남편이 ‘사람을 외롭게 한다’고 느끼거나 새봄이 ‘날 짐처럼 취급하지마’라며 화내는 데에는 그녀의 냉랭한 태도도 한 몫을 했겠죠. 영화는 윤희가 왜 마음의 빗장을 걸어 잠그고 사는지에 대해 섣불리 알려주지 않습니다. 무심하던 윤희의 얼굴은 준의 편지를 받아본 순간 처음으로 무너지고 그녀를 뒤흔듭니다. 그건 준의 편지가 더는 참을 수 없게 되었을 때 터져 나온 말이기 때문일 거예요. 아버지의 죽음을 계기로 준은 윤희에 대한 감정을 다시 마주하게 됐죠. 엉켜버린 현재의 문제들을 풀기 위해선 그 때 그 과거와 화해해야 한다고, 둘은 느꼈던 겁니다.


영화의 분위기는 김희애 배우로부터 비롯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 같다.


 영화는 오랜 세월 동안 멀어져 있던 둘을 서서히, 아주 조심스럽게 연결시킵니다. 저는 <윤희에게>의 섬세하고 신중한 태도가 참 좋았어요. 한 인물의 삶과 그 내면으로 들어갈 때. 그리고 그런 인물들을 이어줄 때 말이예요. 눈이 꽁꽁 언 오타루의 풍경이 차갑거나 매정하게 느껴지지 않았던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 같습니다. 게다가 영화는 먼 과거(의 상대)와 재회하는 이야기임에도 ‘현재’라는 시간에 더 단단히 집중해요. 사실 기억은 그 자체의 내용보다 지금 내게 지니는 의미가 더 중요한 거잖아요. 영화는 과거로 돌아가 보여주지 않고 그 과거와 화해했을 때 윤희가 어떻게 변화해나가는 지를 보여줘요. 오빠의 간섭을 단호히 거부하고, 이력서에 고졸이란 학력을 당당하게 쓰고, 새로운 꿈을 품는 윤희를 보며, 겨울 이후 봄이 온 것은 비단 계절의 변화만은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됩니다. 무엇보다 마침내 윤희는, 준에게 편지를 쓸 수 있게 되죠. 자신의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된 거예요.



 <윤희에게>가 가지는 영화적 의미는 소중합니다. 중년 여성을 다룬 퀴어 영화는 국내에서 찾아보기 힘들죠. 재기발랄한 딸 새봄과 엄마의 관계나 고모와 조카의 유대감도 특별하고요. 임대형 감독은 어느 인터뷰에서 우리 사회가 해야하는 이야기를 시작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꼈다고 말하기도 했어요. 다만 그 이야기를 과거 지향적인 형태가 아니라 미래를 생각하게 하는 방식으로 풀고 싶다고도 했고요. 가장 사적인 말-두 사람 사이의 편지가 다양한 스펙트럼의 감정을 건들이며 공감을 형성할 수 있는 건 아마도 감독의 세심하고 사려깊은 생각으로 영화가 완성됐기 때문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해봅니다.


 



어느 추운 겨울날, 잘 우린 차와 함께 <윤희에게>를 보는 고요한 시간이 여러분과 함께 하길 빌어볼게요.




*같이 읽어보면 좋은 <윤희에게> 임대형 감독의 인터뷰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넘치고 흘러 어떤 모양이든 될 수 있는 물처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