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imi Sep 04. 2017

당신도 혹시 변명을 하고 있지는 않나요?

영화 <아주 긴 변명>

 



 아내가 죽습니다. 아내가 탑승한 고속버스가 추락했다는 사고 소식을 사치오는 외도녀의 품 안에서 듣습니다. 사치오는 중년의 소설가입니다. 제법 유명세를 타는 작가지만 거만하고 이기적입니다. 그는 아내의 죽음에 좀처럼 감응하지 못합니다. 다만 장례식장에 몰려든 카메라 앞에서 감적이 복받쳐 흐르는 척 연기를 합니다. 아내의 유골 상자를 안고 차에 올라타서는 언제 울었냐는 듯 백미러로 앞머리를 매만질 뿐이지요.


 소중한 이를 잃은 후 거치는 숭고한 애도나 힘겨운 극복의 이야기를 기대한다면, 이 영화는 적절하지 않습니다. 사치오는 아내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오래 전 두 사람 사이에 사랑이 있었겠지만, 더는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는 애써 사라진 사랑을 재건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습니다. 나는 <아주 긴 변명>을 사랑이나 상실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성장과 성숙에 대한이야기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사치오는 물론 괴로워합니다. 아내를 잃은 상실감에서 비롯되는 비통함이 아닙니다. 엄청난 비극을 겪고 나서도 제대로 된 작품 한 줄을 쓰지 못해 고통스러워합니다. 작가로서의 무능력이 그를 자괴감에 빠져들게 하지요. 아내의 죽음을 글감으로 삼는 일이 비겁한 줄 알지만, 그마저도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결국 사치오에게 그를 괴롭힐 수 있게 허용된 대상은 자기 자신뿐이었던 겁니다.


 사치오는 아내가 생전 가장 친하게 지냈던 친구의 남편 요이치를 만나게 됩니다. 아내와 함께 여행을 떠났던 그녀 역시 같은 사고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요이치는 사치오와 반대로, 아내의 죽음을 거대한 비극으로 안고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아내를 끔찍이 사랑했고, 그 결과 감당할 수 없는 상실의 그림자가 그의 삶 전체를 뒤덮고 말았습니다. 사치오는 요이치의 어린 아들이 잠든 숨소리를 들으며 노트에 오랜만에 한 문장을 쓰게 됩니다. 그리고 별안간 요이치에게 친절을 약속합니다. 장거리 운전기사인 요이치가 집을 비우는 며칠간, 자신이 아이들을 돌봐주겠다고요. 어쩌면 그 한 줄은 작가로서, 그리고 한 인간으로서 전환점을 맞이한 출발점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는 활력을 되찾습니다. 서툴지만 차근차근 아이들과 일상을 만들고 마음을 나누게 됩니다. 조금 삐뚤어진 생각이라고 비난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사치오가 느낀 만족감이 자신에 대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에게 부족했던 인간적인 온기를 갖게 되는 만족감 같은 거죠. 보답을 바라지 않고 누군가에게 친절을 베푸는 성숙한 어른이 되었다는 도취감. 자기 만족에 초점이 맞춰있던 미완의 애정은 결국 그가 아무리 아버지 노릇을 잘해도 진짜 아버지를 대체할 수 없다는 현실을 깨달을 때 터지고 말지요. 그리고 우연히 아내의 메모를 읽게 되면서 그는 다시 벼랑으로 내몰리죠.


 사치오는 아내의 죽음이 자신에게 내려진 형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죽은 아내는 자신을 싫어했기 때문에 (뒤늦게 안 사실이지만, 그리고 사실인지 거짓인지도 확실치 않지만) 그녀의 입장에서는 기가 막힌 복수를 한 셈이라고 그는 흥분했지요. 남겨진 삶은 그의 말대로 어떤 의미에선 벌일지 모르겠습니다. 남겨진 사람들은 책임져야 합니다. 떠나간 사람이 미처 치우지 못한, 또는 치우지 않은 것들을. 대부분 그것들은 어렵고 성가시기도 한 과제 같은 것입니다. 특히 존재했던 이의 부재, 그리고 그 부재를 어떻게 대할 지에 대한 결심이 중심이 됩니다. 죽음을 정리하지 못한 사람은 남은 삶을 어지럽게, 지저분하게, 살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미용사였던 아내는 떠나던 날, 거실에서 사치오의 머리를 잘라주었습니다. 약속시간에 늦어 서둘러 가면서 그녀는 그에게 말하지요. “뒷정리를 부탁해.” 그는 뾰루퉁한 얼굴로 할 생각이었다고 대답합니다. 그러나 남겨진 그가 삶을 정돈하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타인을 불쌍히 여길 수 있는 마음이 생겨나야 했고, 애정을 나눌 수 있어야 했고, 가질 수 없는 것을 인정하는 법도 배워야 했고, 어쩔 수 없는 쓸쓸함도 감당해야 했으니까요. 계절이 바뀌고 그는 마침내 요이치와 그의 아들이 탄 트럭이 멀어질 때까지 아련한 눈빛으로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가 발표한 새 작품도 분명히 달라진 그를 암시해주는 것이겠지요.



 



 사치오는 어느 햇살 좋은 날, 아내의 마지막 짐들을 정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거실의 미색 커튼이 나폴거립니다. 열어놓은 문틈으로 바람이 스며 드는 게 분명합니다. 아내의 물건을 정리하는 사치오의 모습은 슬프지도 비장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따듯하고 친근해 보였습니다. 그는 아내에게, 또 자신에게 이기적이고 비겁했던 과거에 대한 변명을 마치게 되었습니다. 아주 긴 그 변명을 마치고 그는 이제 새로워질 것입니다.


 사치오의 집 안으로 들어오는 햇빛과 바람의 신중한 움직임이 여전히 떠오릅니다. 그것들은 사치오의 등을 격려하듯 어루만져주고 있었습니다. 나는 생각해봅니다. 나는 나 자신에게 뻔뻔하게 둘러대고 있는 것이 없는지. 지저분하고 흉한 삶의 어떤 부분에 대해 손대지 않고 열심히 변명만하고 있는건 아닌지 말입니다. 말과 글을 번지르르하게 닦는 소설가가 누구보다 긴 변명을 했던 것은 참 아이러니했지요. 나에겐 그런 부끄러운 모순이 없는지 생각해 볼 일 입니다.






<아주 긴 변명> 공식 포스터


매거진의 이전글 스미듯이결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