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의인(黑衣人)과 백의인(白衣人)의 이야기
저어기 노란 나무 위에 돌이 하나 놓여있다
나무 위에 혼자 우뚝 서 주위를 둘러본다
문득 외로워지면 검은 다리를 건너 움직인다
문득 다리가 아파오면 잠시 앉아 쉬며 친구를 기다린다
저어기 건너편 이웃집에 친구가 들어왔다
오랜만에 보는 친구에게 반갑게 인사한다
둘이 힘을 합쳐 조그마한 마을을 꾸민다
담을 세우는 일도 보금자리를 넓히는 것도
친구와 함께하니 즐겁기만 하다
저어기 반대쪽 이웃집에 새로운 친구가 들어왔다
처음 보긴 하지만 흰 옷을 입고 있어 왠지 꺼림칙하다
우리 집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튼튼한 벽을 세운다
그랬더니 나보다 집도 작으면서 한 줄 더 높은 벽을 세우더라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모르겠다
저어기 꺼림칙한 친구가 내 친구에게 다가온다
은근슬쩍 친근한척 어깨에 손을 올린다
내 친구가 괜찮은척 받아주자 꺼림칙한 친구는 펄쩍 뛰며 좋아한다
내 친구는 예의가 바른 것 뿐이지 절대 저런 걸 좋아할 리 없다
저어기 꺼림칙한 친구가 또 내 친구와 만났다
많이 친해지기라도 한 것처럼 내 친구 머리에 손을 올린다
더는 두고 볼 수 없어 친한 척 그만 좀 하라고 소리를 질렀다
미안하다고 말하는 녀석 앞에서 친구 손을 잡고 빠져나왔다
내 친구가 나에게 묻는다
쟤랑 친하게 지내면 왜 안돼?
내가 답한다
하얀색 옷 입은 애들은 우리를 이용하는 애들이야
친구가 말한다
쟤는 좋은 애 같던데 얘기 좀 해보지 그래?
나는 대답하지 않고 자리를 피한다
기분이 언짢아서 마을 밖으로 산책을 나간다
마을 밖으로 나섰는데 그 녀석과 마주쳤다
녀석을 피해 돌아서 지나가려는데 녀석이 길을 막고 묻는다
저한테 기분 나쁜 것 있었나요?
아니라고 답했지만 제대로 답할 때까지 길을 터주지 않겠다는 눈치다
기분을 풀지 못한 채로 다시 마을로 돌아간다
마을에 문제가 생겼다
담이 너무 약해져서 외부인들이 담을 깨고 들어올 수 있다
꺼림칙한 녀석이 담에 무슨 짓을 한 게 분명하다
따지러 갈까 생각했지만 담이 무너지기 전에
먼저 고친 다음 따지러 가야겠다
마을에 하얀 옷 입은 여자가 찾아왔다
날이 늦었으니 하루만 머물게 해 달란다
하얀 옷을 입고 있으면 머물 수 없다고 말하려는데
내가 입을 열기 전 친구가 먼저 괜찮으니 편하게 머물다 가라고 말한다
친구 녀석이 딴 마음을 품은 건 아닌지 걱정이다
하얀 옷 여자가 머물 장소를 만든다
발을 뻗고 잠들기 편한 구석진 자리를 내준다
뼈대를 세우고 천을 덧대니 대충 천막같은 것이 만들어졌다
머물 곳을 마련해 준 뒤 잠시 윗동네로 산책을 나왔다
바깥 공기를 쐬니 머리속이 시원해지는 느낌이 든다
산책 후 집으로 돌아가던 중 또 꺼림칙한 녀석을 마주쳤다
녀석이 내 팔을 붙잡고 처량한 목소리로 묻는다
형님, 제 동생 못 보셨어요?
그저께 오기로 한 동생이 오늘까지도 소식이 없단다
그런 사람 못 봤다고 대답한다
하얀 옷을 입기는 했지만 그런 사람이 이 녀석의 동생일리는 없다
녀석은 기운이 빠진 채 뒤로 물러나 꺼이꺼이 운다
날이 밝으면 같이 찾아보기로 하고 이 녀석의 집에서 잠들었다
날이 밝아 녀석을 데리고 마을로 돌아갔다
친구에게 이 녀석의 동생을 아느냐고 물었지만 모른다고 한다
어깨가 푹 수그러든 녀석을 뒤로 한 채 천막으로 다가간다
곤히 자는 사람을 깨우고 싶지는 않지만 아침을 먹기 위해 안의 사람을 깨운다
천막 밖으로 나온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오빠 왔네?라고 말한다
녀석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멍한 표정을 짓는다
이내 정신을 차린 녀석은 그녀를 품에 안고 어제처럼 끅끅 소리를 내며 운다
새하얀 남매가 서로 어깨를 맞대자 눈이 내린 것처럼 눈부신 광경이 펼쳐진다
녀석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고맙다며 몇 번이나 고개를 숙인다
답례로는 무너진 담을 고치게 도와준단다
천막을 세운 자리에 집이라도 한 채 지어줄 수 있단다
집은 됐고 바깥마을 나갈 때 좀 편하게 가게 해달라고 말했다
반드시 그렇게 하겠다며 주먹을 쥐는 모습을 보니 미소가 지어진다
친구와 함께 세웠던 조그마한 마을은 여전히 작지만 처음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친구가 지은 까만 3층 집과 작은 하얀색 천막이 사이좋게 자리잡고 있다
친구와의 거리는 조금 떨어졌지만 한 블럭 건너면 친구 집이니 문제가 없다
나는 보금자리를 그 녀석이 살던 윗동네 집으로 옮겼다
그 녀석과는 자주 만나 술도 마시곤 한다
오래 봤지만 그 녀석이 무슨 일 하는지 어디 사는지는 아직도 잘 모른다
중앙 쪽과 연이 닿아있다고는 들었는데 그게 어떤 건지 나는 잘 모르겠다
함께 산다는 건 좋은 일 같다
서로 색깔 때문에 싸우지 않아도 된다
상대의 약점을 노릴 필요도 없고
내 약점을 들키지 않으려 전전긍긍 하지 않아도 된다
상대의 진심을 의심할 필요가 없고
복잡하게 계산할 것 없이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면 된다
이 세상이 꽉 차버려 거인의 손아귀가 모든 것을 쓸어갈 때까지
이렇게 평화롭고 즐거운 시간을 누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