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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반 포석 - 바둑 시

흑의인(黑衣人)과 백의인(白衣人)의 이야기

by 이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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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어기 노란 나무 위에 돌이 하나 놓여있다

나무 위에 혼자 우뚝 서 주위를 둘러본다

문득 외로워지면 검은 다리를 건너 움직인다

문득 다리가 아파오면 잠시 앉아 쉬며 친구를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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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어기 건너편 이웃집에 친구가 들어왔다

오랜만에 보는 친구에게 반갑게 인사한다

둘이 힘을 합쳐 조그마한 마을을 꾸민다

담을 세우는 일도 보금자리를 넓히는 것도

친구와 함께하니 즐겁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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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어기 반대쪽 이웃집에 새로운 친구가 들어왔다

처음 보긴 하지만 흰 옷을 입고 있어 왠지 꺼림칙하다

우리 집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튼튼한 벽을 세운다

그랬더니 나보다 집도 작으면서 한 줄 더 높은 벽을 세우더라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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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어기 꺼림칙한 친구가 내 친구에게 다가온다

은근슬쩍 친근한척 어깨에 손을 올린다

내 친구가 괜찮은척 받아주자 꺼림칙한 친구는 펄쩍 뛰며 좋아한다

내 친구는 예의가 바른 것 뿐이지 절대 저런 걸 좋아할 리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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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어기 꺼림칙한 친구가 또 내 친구와 만났다

많이 친해지기라도 한 것처럼 내 친구 머리에 손을 올린다

더는 두고 볼 수 없어 친한 척 그만 좀 하라고 소리를 질렀다

미안하다고 말하는 녀석 앞에서 친구 손을 잡고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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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친구가 나에게 묻는다

쟤랑 친하게 지내면 왜 안돼?

내가 답한다

하얀색 옷 입은 애들은 우리를 이용하는 애들이야

친구가 말한다

쟤는 좋은 애 같던데 얘기 좀 해보지 그래?

나는 대답하지 않고 자리를 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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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분이 언짢아서 마을 밖으로 산책을 나간다

마을 밖으로 나섰는데 그 녀석과 마주쳤다

녀석을 피해 돌아서 지나가려는데 녀석이 길을 막고 묻는다

저한테 기분 나쁜 것 있었나요?

아니라고 답했지만 제대로 답할 때까지 길을 터주지 않겠다는 눈치다

기분을 풀지 못한 채로 다시 마을로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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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에 문제가 생겼다

담이 너무 약해져서 외부인들이 담을 깨고 들어올 수 있다

꺼림칙한 녀석이 담에 무슨 짓을 한 게 분명하다

따지러 갈까 생각했지만 담이 무너지기 전에

먼저 고친 다음 따지러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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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에 하얀 옷 입은 여자가 찾아왔다

날이 늦었으니 하루만 머물게 해 달란다

하얀 옷을 입고 있으면 머물 수 없다고 말하려는데

내가 입을 열기 전 친구가 먼저 괜찮으니 편하게 머물다 가라고 말한다

친구 녀석이 딴 마음을 품은 건 아닌지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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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옷 여자가 머물 장소를 만든다

발을 뻗고 잠들기 편한 구석진 자리를 내준다

뼈대를 세우고 천을 덧대니 대충 천막같은 것이 만들어졌다

머물 곳을 마련해 준 뒤 잠시 윗동네로 산책을 나왔다

바깥 공기를 쐬니 머리속이 시원해지는 느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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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 후 집으로 돌아가던 중 또 꺼림칙한 녀석을 마주쳤다

녀석이 내 팔을 붙잡고 처량한 목소리로 묻는다

형님, 제 동생 못 보셨어요?

그저께 오기로 한 동생이 오늘까지도 소식이 없단다

그런 사람 못 봤다고 대답한다

하얀 옷을 입기는 했지만 그런 사람이 이 녀석의 동생일리는 없다

녀석은 기운이 빠진 채 뒤로 물러나 꺼이꺼이 운다

날이 밝으면 같이 찾아보기로 하고 이 녀석의 집에서 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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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밝아 녀석을 데리고 마을로 돌아갔다

친구에게 이 녀석의 동생을 아느냐고 물었지만 모른다고 한다

어깨가 푹 수그러든 녀석을 뒤로 한 채 천막으로 다가간다

곤히 자는 사람을 깨우고 싶지는 않지만 아침을 먹기 위해 안의 사람을 깨운다

천막 밖으로 나온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오빠 왔네?라고 말한다

녀석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멍한 표정을 짓는다

이내 정신을 차린 녀석은 그녀를 품에 안고 어제처럼 끅끅 소리를 내며 운다

새하얀 남매가 서로 어깨를 맞대자 눈이 내린 것처럼 눈부신 광경이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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녀석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고맙다며 몇 번이나 고개를 숙인다

답례로는 무너진 담을 고치게 도와준단다

천막을 세운 자리에 집이라도 한 채 지어줄 수 있단다

집은 됐고 바깥마을 나갈 때 좀 편하게 가게 해달라고 말했다

반드시 그렇게 하겠다며 주먹을 쥐는 모습을 보니 미소가 지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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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와 함께 세웠던 조그마한 마을은 여전히 작지만 처음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친구가 지은 까만 3층 집과 작은 하얀색 천막이 사이좋게 자리잡고 있다

친구와의 거리는 조금 떨어졌지만 한 블럭 건너면 친구 집이니 문제가 없다

나는 보금자리를 그 녀석이 살던 윗동네 집으로 옮겼다

그 녀석과는 자주 만나 술도 마시곤 한다

오래 봤지만 그 녀석이 무슨 일 하는지 어디 사는지는 아직도 잘 모른다

중앙 쪽과 연이 닿아있다고는 들었는데 그게 어떤 건지 나는 잘 모르겠다

함께 산다는 건 좋은 일 같다

서로 색깔 때문에 싸우지 않아도 된다

상대의 약점을 노릴 필요도 없고

내 약점을 들키지 않으려 전전긍긍 하지 않아도 된다

상대의 진심을 의심할 필요가 없고

복잡하게 계산할 것 없이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면 된다

이 세상이 꽉 차버려 거인의 손아귀가 모든 것을 쓸어갈 때까지

이렇게 평화롭고 즐거운 시간을 누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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