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적으로 생각하면 그의 말도 맞았다. 언제 다시 준비해서 언제 다시 취업하겠는가? 새로운 분야로 다시 준비한다고 해도 잘 될 보장이 있을까? 아니. 원하는 코딩을 배운다 한들 나이 서른은 신입으로 그다지 경쟁력이 있지 않을 것이다. 하물며 돈은? 그동안 꼬박꼬박 받아왔던 월급은 더 이상 없을 것이며, 취업에 성공한다고 한들 원래 받던 돈보다 훨씬 적은 돈을 받으며 회사를 다녀야 할 수도 있다. 친구들은 하나둘 자리도 잡고, 결혼도 하는데 그저 일이 안 맞아 그만뒀다는 말은 스스로 생각해도 핑계라고 밖에 느껴지지 않을 수 있다. 궁극적으로는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사는 사람이 세상에 얼마나 있겠는가? 안 맞는 일을 하며 사는 게 일반적인 우리네 세상 아닌가?
그는 일이 안 맞고, 스트레스가 쌓여 견디다 못해 나왔지만 사실 이보다 더 최악의 상황은 따로 있었던 것이다. 바로 ‘하고 싶은 일에 도전했지만, 결국 잘 풀리지 않았을 때의 나를 마주하는 것’. 모든 게 뜻대로 되지 않고, 나를 지켜줄 가족마저도 나를 비난하고, 나와 친했던 친구들마저도 그럴 줄 알았다며 나를 비웃을것만 같은 순간.
현실적으로 생각하면 모든 게 계획대로 술술 잘 풀리기보다는 이러한 슬픈 상황이 더 일어날 확률이 높다고 생각해 그는 꿈을 포기할 수 밖에 없던 것이다. 그가 바보이기때문에 원형탈모의 소굴로 다시 들어가려는 선택을 한 게 아니라 오히려 너무나 현실적이기 때문에 자신의 가능성을 스스로 꺾는 사람이었다. 새로운 분야로 도전해 최악의 상황을 맛보느니 그냥 좋아하진 않더라도 경력을 살릴 수 있는 차악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 이런 가혹한 현실 따윈 모르고 ‘당신은 아직 늦지 않았어요!’라고 말하는 내 모습이 마냥 어리고 순수하게 보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30살은 늦었다며 확신 있게 말하는 그처럼 나 또한 여행이 길어질수록 확실하게 알게 된 것이 하나 있다. 바로 ‘어떤 일을 하며 살지?’에 대한 고민은 30대부터가 본격적인 시작이라는 것.
튀르키예 여행 이후에 ‘여행자들의 블랙홀’ 이집트 다합에 가서 족히 백 명은 넘는 한국인 여행자들과 함께 밤하늘의 별을 새며 동고동락했다. 한국에 돌아오면 무슨 일을 해야 할지 항상 고민이었던 나는 새롭게 만나는 여행자들마다 그들의 직업과 만족감을 탐정처럼 수집 했는데 정보가 누적될수록 깜짝 놀란 사실이 있다. 바로 여행을 떠나 온 사람들 대부분이 30대가 되어도 40대가 되어도 진로에 대한 확신을 가진 사람은 손에 꼽을 만큼 없다는 것. 그들은 갓 대학을 졸업한 나와 별반 다르지 않게 ‘ 앞으로 뭐 해 먹고살지?’에 대한 고민을 끊임없이 하고 있었으며, 어떤 사람들은 서른 중반에 새로운 도전을 하기 위해 준비 중이기도 했다. 심지어 적성에 잘 맞고 힘들지도 않은데 좋아하는 일을 해보지 않은 게 후회되어 ‘삼성전자’를 퇴사하고 온 친구도 있었다. 30대, 40대가 돼도 심지어 안정적인 직장에 다녀도 여전히 방황하는 사람들과 얘기하며 나는 지금 이 순간에 A가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라는 생각을 종종 했다. 자신처럼 방황하는 사람들이 한 명 두 명씩 나타나고, 그 사람들이 어느 순간 열 명 스 무명을 넘어 원래 알고 지내던 사람들보다 많아졌을 때. 내가 정말 늦은 줄 알았는데 나보다 나이가 많은 조건에서도 시작한 사람을 만났을 때. 안 맞는 분야를 때려치우고 새로운 분야로 도전하는 게 더 이상 바보같고 이상해 지지 않는 순간이 올 때. 차가운 현실에도 불구하고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결의를 다지며 무언가 새롭게 시작할 용기를 얻을 때.
A 씨가 그 순간을 맛봤다면… 이야기는 달라지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