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가시노 게이고
*작성일 : 2025년 1월 31일
얼마 전 옆 팀 동료들과 점심을 먹던 중
책 이야기가 나왔다.
그중 한 분이 본인은 히가시노 게이고의 추리소설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그때 군대 독서실에서 히가시노 게이고의 백야행, 용이자 X의 헌신 등을 맘 졸이며 읽었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라떼(?)는 군대에서 할 수 있는 게 많이 없어서,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보고나 PMP에 드라마를 다운 받아와 보곤 했다.
그래서 이번 휴가를 준비하며, 예전에 사두고 아직 읽지 않은 이번 책을 캐리어에 집어넣었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책을 잔뜩 빌려 내무반으로 돌아올 때의 설렘이 있었다.
“농담 아닌데, 이게 증거야.” 남자는 접시 위에 접어놓은 냅킨을 펼쳤다. 그 안에서 모습을 드러낸 건 피 묻은 나이프였다.” – 62 페이지
살인 사건의 첫 번째 베일이 벗겨지는 장면이다. 예상치 못한 부분에서 범인이 자백하며, 독자에게 강한 몰입감을 선사한다. 범인이 너무 갑작스럽게 튀어나와 당황스러운 부분도 없지 않아 있다.
작가의 전형적인 챕터 마무리 방식이다. 항상 궁금증을 유발하며 챕터를 끝내 바로 다음 챕터로 넘어가고 싶게 만든다. 이렇게 보다 보면 어느새 책을 거의 다 보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야마노우치 가족]
야마노우치 시즈에, 와시오 하루나, 와시오 에이스케
[구리하라 가족]
구리하라 마사노리, 구리하라 유미코, 구리하라 도모카
[사쿠라기 가족]
사쿠라기 요이치, 사쿠라기 지즈루, 사쿠라기 리에, 마토바 마사야
[다카쓰카 가족]
다카스까 슌사쿠, 다카스까 게이코, 고사카 히토시, 고사카 나나미, 고사카 가이토 – 73 페이지
히가시노 게이고의 추리소설에는 항상 많은 인물이 등장한다. 그리고 일본 이름은 너무 길고 이들끼리도 비슷한 부분이 많아서, 그 흐름을 놓칠 때가 있다. 따라서 등장인물마다의 직업과 고유 특징을 통해 그들을 기억하려 했다. 이번에는 야마노우치는 의사-간호사 부부, 구리하라는 회계사-미용사 부부, 사쿠라기는 병원 원장과 의사서방, 다카쓰카는 회장님과 직원가족으로 어느 정도 반복 연습 후에 페이지를 넘겼다.
하루나는 핸드백에서 봉투를 꺼냈다. 같은 봉투였고, 다른 점은 받는 사람이 적혀 있다는 것이었다. 이틀 전 받은 편지였다. 보낸 사람은 알 수 없었다. 봉투에서 편지를 꺼냈다. 이 역시 호텔의 편지지였다. 그리고 거기에는 짧은 한 줄이 인쇄되어 있었다. '당신이 누군가를 죽였다.' – 103 페이지
책의 제목이 처음으로 나오는 대목은 항상 중요하다. 작가 또한 그 부분을 염두하고 글을 썼을 것이다. 살인 사건을 같이 고민하는 독자 입장에서도, 이 편지지와 그 내용이 무엇인지 전혀 감이 오지 않는다. 그러나 이 말은 무언가 간담을 서늘하게 하고 주위를 환기시킨다. 이 부분을 읽은 순간 주책을 놓고 주변을 한번 살펴봤던 기억이 있다.
“모든 사람이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우리 중에 히카와와 관련된 사람이 있다는 건가요?”
“그러니까 말씀드린 겁니다. 여러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는 진상에 도달할 수 없다고요. “ – 170 페이지
추리소설 내 피의자의 일반적인 범행 동기는 원한과 복수심이다. 이 대목에서는 히카와의 묻지마 살인 또한 어떠한 사주 혹은 동기가 있을 수 있다는 가가 형사의 전문가적 촉을 보여준다. 이러한 대사를 통해 이때까지 범행 자체에만 집중하던 독자는 처음으로 그 포커스를 인물들에게 돌리게 된다.
“이 문장은 이렇게도 바꿔서 말할 수 있을 겁니다. 당신들은 모두 일찍이 어딘가에서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았다.” 세리주를 마시던 하루나는 가가의 말을 듣고 사례가 들릴 뻔했다. 잔을 내려놓고 황급히 숨을 골랐다. – 237 페이지
사건의 중심이 그 가족들일 수 있고, 그 동기는 범행 이전부터 계속적으로 존재했을 수 있음을 말해주는 부분이다. 결국 ‘당신은 누군가를 죽였다’라는 말은 복선이다. 모두 피해자이자 유가족으로만 생각했던 사람들의 개인사 혹은 그 속내를 파헤쳐야 함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끔찍한 세상이다. 다시금 그런 생각이 들었다. 살인사건 피해자를 비방해서 얻는 게 뭐란 말인가. – 256 페이지
소설 내 등장인물들은 결국 그 좋지 못한 행실과 습관으로 인해 다른 이의 원한을 사 살해당한다. 이런 부분에서 독자는 어느 정도 해소감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도 이런 모습들이 자주 보이곤 한다. 물론 그 속내를 다 알 수는 없지만, 피해자와 그 유가족에 대한 속단과 익명성에 숨어 그들을 비방하는 행위는 명백한 2차 가해이다. 나 또한 비슷한 뉴스나 기사들에 달리는 댓글들을 볼 때마다 눈살이 찌푸려지고 마음이 아프다.
“히카와예요. 히카와 마호. 그게 내 본명입니다. 이미 눈치채셨겠지만, 히카와 다이시의 동생입니다.” – 281 페이지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서설이 전개된다. 완전한 베일 속에 가려져 아무 정보도 없는 범인의 동생이 피해자 간담회에 가명으로 참석하고 있었던 것이다. 저자는 어떻게 하면 독자가 소름이 돋고 몰입할 수 있는지 정말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피의자의 동생이 왜 이곳에 당당하게 들어와 있는지, 유가족들의 반응을 어떨지 빠르게 다음장으로 넘어가고 싶다는 생각만 들었던 것 같다.
마토바의 얇은 입술 사이로 냉소가 새어 나왔다. “역시 알고 계셨군요. 언제부터입니까?” 사쿠라기 지즈루는 고개를 기울였다. – 361 페이지
어렸을 때 즐겨 보던 명탐정 코난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코난은 마취침을 쏘아 유미란의 아버지 유명한을 마취시키고 목소리를 변조해서 추리를 시작한다. 그리고 그 추리의 마지막은 항상 아무도 생각지 못한 인물을 범인으로 지목한다. 그리고 그 범인들은 하나같이 이렇게 자백하기 시작한다. “그는 한때는 자상한 사람이었어요.”
흐음, 도모카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사형당해도 되는데.” -380 페이지
마냥 순수하고 불쌍하게만 여겨지던 도모카가 이런 살인을 계획했다는 것이 다시 한번 놀라움과 한편으로는 두려움까지 느꼈다. 부모의 일탈과 그들의 가정에 대한 경시가 자식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겉으로 보기엔 그 누구보다 단란하고 사랑스러운 가족이지만, 그 속내는 썩어 문들어져 복구가 불가능한 상태이다. 그리고 그녀는 이 모든 비극의 원인 제공자들을 제거하기 위해 위험한 상상들을 시작하게 된다. 그리고 인터넷을 통해 그 행동대장이 되어줄 사람까지 찾아 결국 일을 저지르고 만 것이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와 발견한 것은 변해 버린 루비의 모습이었다. 루비는 도모카 방의 옷장에서 눈도 감지 못하고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팔다리는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 386 페이지
루비는 도모카의 유일한 가족이었다. 그리고 그 유일한 가족을, 자신의 행복한 삶을 송두리째 빼앗아간 가짜 가족인 부모가 죽인 것이다. 여기서 그녀는 부모와 세상에 대한 엄청난 배신감을 느끼고 그들을 죽이겠다는 생각이 싹트기 시작한다. 결국 가짜 가족이 진짜 가족을 죽였고, 그로 인해 가짜 가족을 죽이겠다고 나서는 것이다.
“그럼 솔직하게 여쭤보겠습니다. 와시오 하루나 씨, 그 나이프를 쓴 사람은 당신이죠? 당신이 누군가를 죽였다… 아닙니까?” – 415 페이지
소설의 주인공이자 1인칭 시점의 하루나 또한 본인의 사연으로 인해 살인을 저지른 피의자이다. 책을 보며 하루나도 뭔가 있을 것이라고 짐작하고는 있었지만 심증만 있을 뿐 물증이 없었다. 결국 가가를 통해 마지막 실마리를 풀며 소설은 마무리된다.
푸꾸옥 리조트 수영장 썬배드에 누워 이 책을 읽었다.
따스한 날씨와 평화로운 풍경들과 대비되는 이 스릴 넘치는 이야기는,
이 아름다운 리조트에서도 언제든지 끔찍한 살인이 일어날 수 있다는 무언의 경고를 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가끔 서점에서 히가시노 게이고의 책을 본다면, 고민하지 않고 짚어 들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