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연
*작성일 : 2025년 3 월 14일
싱가포르에서의 독서 마지막 편을 써야겠다.
화려한 호텔 객실과 인피니티풀 선배드에 누워 읽기에는
다소 잔잔하고 가슴 먹먹한 소재들의 이야기들이 담겨있는 소설이었다.
일단 제목이 특이하다.
망하면 완전히 망한 거지, 조금 망한 건 무슨 말일까?
특히 사랑이라는 장르는 더더욱 모 아니면 도 아닌가 싶기도 했다.
그렇게 조금은 비딱한(?) 시선으로 첫 번째 이야기 ‘포기’를 폈다.
“민재가 다 갚으면 어쩌지?”
“뭘 어떡해. 고기 파티 하러 가자. 양꼬치 실컷 먹자.”
“그때는 민재가 잘 지내는지 어떻게 알지?”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럼 나중에는 매달 천원씩만 갚으라고 해. – 37 페이지
헤어진 연인과 돈 문제로 어쩔 수 없이 계속 연락하고 추심해야 하는 불편한 관계, 예전에는 사랑으로 버텼지만 지금은 채권자와 채무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관계 그러나 이 불안하고 불편한 사이가 역설적인 안정감을 주고 있는 이 오묘한 관계. 작가가 이야기하는 첫 번째 약간 망한 사랑이다.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의 미정도 이와 같은 상황에 놓여 있다. 그녀의 전 남자친구는 그녀와 주변 사람들에게 사업하겠다며 돈을 빌려 해외로 잠적한다. 미정은 계속적으로 그에게 연락해 돈을 갚으라고 매달린다. 이런 그녀의 모습은 표면적으로 보면 상당히 안타까운 채권자일 뿐이지만, 그 속내에는 아직 그와의 관계에 미련이 많고, 빚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그와의 관계를 붙잡고 있는 것이다.
현실의 채무가 마음의 채무보다 견디기 훨씬 쉬워서 일 것이다.
빚이야말로 정현이 잘 돌보고 보살펴 임종에 이르는 순간까지 지켜봐야 할 그 무엇이었다. 빚 역시 앞으로 수년간은 정현의 옆자리를 떠나지 않을 것이고, 정현이 죽었나 살았나 그 누구보다도 두 눈 부릅뜨고 계속 지켜볼 것이다. 빚이야말로 정현의 반려였다. – 79 페이지
반려는 동물이나 식물에 어울리는 단어라고만 생각했고, 인간에게 이로워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있었다. 반려빚이라니. 발상과 단어 자체가 재밌어서 가저온 부분이다. 빚은 갚아 없어져야 할 무익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평생 못 갚을 큰 빚을 차라리 반려로 생각하라는,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추천하는가 싶었다.
요즘의 나를 돌아보면, 평생 가져가야 할 2가지는 독서와 운동이다. 나에게는 반려독서와 반려운동이 내 임종의 순간 나의 육체가 담긴 관 위에 가장 먼저 국화꽃을 던져줄 것이다.
결국 세 사람이 함께 찍은 사진은 안지가 가지게 되었다. 다시 돌려주기도 찢어버리기도 불태워버리기도 애매했다. 자신과 똑 닮은 아이가 있는 사진이니까. 안지는 그 사진을 자신의 지갑에 넣고 다녔다. 그 여자가 그랬던 것처럼. 언젠가 우연히 여자를 다시 만나게 되면 돌려줄 작정이었다. 그런 날이 오리라고는 전혀 기대하지 않으면서도 어쩌면 그런 일이 벌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으로. – 168 페이지
남편이 새로운 여자와 바람이 나 이혼하고, 갓난아기도 그 집으로 보내 버린다. 세월이 지나 남편이 죽게 되는데, 하늘이 내려준 보상인지 사망 보험금이 자신에게 지급된다. 어느 날 내연녀가 찾아와 아이를 키워야 하니 보험금의 일부를 달라고 이야기한다. 뭔지 모를 모성애가 생겨 달라는 대로 보험금을 송금한다. 돈을 달라고 찾아온 날 그 내연녀가 놓고 간 전남편의 가족사진을 챙겨 자신의 지갑 속에 넣어 두고 다닌다. 이 모든 것이 담담하다.
바람, 이혼, 죽음만 보면 상당히 망한 느낌이다. 속된 말로 개망했다. 그러나 이 상황들을 받아들이고 대처하는 화자의 태도와 감정상태를 보면 그렇게 심하게 망한 것 같지는 않다. 정말이지 약간 망한 것처럼 보인다.
총 9개의 약간 망한 삶의 이야기를 보며,
‘약간 망했다’는 결국 ‘아직 망하지 않았다’와 같은 말로 여겨진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 인생이 가장 서글프고 고단하고 착각한다.
혹 빚지고 이혼하고 다치고 헤어지기라도 하면, 세상이 종말 할 것처럼 받아들인다.
그러나 발생은 순간이지만 삶은 연속이고,
약간 망하는 순간이 있더라도 자의적이든 타의적이든 계속 살아내야 한다.
약간 망할 순 있지만, 아직 망한 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