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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 Mar 22. 2024

울고 싶다.

나는 멜로 영화나 슬픈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 부류의 영화를 보다 보면 억지로 눈물샘을 짜내려는 작위적인 느낌이 강하게 들어서일 거다. 사실, 영화들만의 스토리는 관객을 일부러 울게 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만든 것은 아니다.

다만, 내가 어릴 적부터 눈물을 흘리는 건 남자답지 못하다는 선입견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느낌을 굳이 참아내야 하나라고 생각된다. 남자가 아닌, 여자가 아닌 사람으로서 갖는 감정은 다채롭기 그지없다. 그렇기에 기쁠 땐 웃고, 화낼 땐 화도 내고 슬플 땐 통곡하듯이 울어야 한다. 


30대가 되어 살아가다 보니 사람은 로봇이 아니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곤 한다. 하지만 인간관계라는 것이, 사회라는 세상이, 문화라는 감정이 사람을 사람답게 살지 못하게 함을 더더욱 뼈저리게 느끼도록 한다. 


울고 싶다. 바닥에 무릎 꿇은 채 소리 내어 울고 싶다. 

가면을 쓰고 이제껏 모든 사람들에게 괜찮은 척해왔다. 

오글거린다며, 

남자라는 이유로, 

나이를 먹은 어른이라는 등의 자잘한 이유를 수십 수백 번 들먹이며 울지 못하게 하는 세상이 밉다. 

세상이 너무 미워서 울고 싶다. 

땅바닥을 주먹으로 내리치며 펑펑 울고 싶을 때가 있다. 


울고 나면 괜찮아질까 싶다가도 울어버리기에 우울이 상기되는 것은 아닐까 두렵기까지 하다. 


사람들은 내가 괜찮은 줄만 알겠지. 그들에게는 나의 우는 모습을 보인 적이 없으니. 

사무실에서 항상 미소 지으며 모두에게 해맑은 미소만을 보이던 그 순간마저도 나를 찾아오는 우울은 당신들은 모를 테지. 


우울은 여러 가면을 쓰고 있다. 그 자체로 다가오는 우울, 기쁨이란 가면을 쓰고 있다가 슬쩍 드러내는 우울, 분노라는 가면을 쓰고 있다가 본색을 드러내는 우울...


우울을 벗어내려면 나는 도대체 무엇을 해야 하나. 

우울을 울음으로 치환시킬 수 있다면 세상 떠나갈 듯이 울 수 있을 텐데. 


상처는 없어지지 않는다. 상처는 항상 그 자리에 존재한다. 

고름이 나고, 

곯아터지고, 

흉터가 생길지언정 상처 자체는 없어지지 않는다. 


우울도 마찬가지다. 

항상 그 자리에 존재하고 있다. 

친한 친구와 있어도, 

사랑하는 연인과 가족들이 있다 하더라도. 

항상 곁애 있다. 


그러므로 울고 싶다.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내 스스로의 감정을 드러내고 스스로를 알아가고 싶다. 


나는 누구일까. 서른즈음의 나이가 들어도 모르겠다. 

나는 누구이기에 이렇게나 복잡할까.  


아... 바람만이 귓가에 스치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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