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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knock Mar 03. 2024

<가여운 것들> 요르고스 란티모스, 2023

종잡을 수 없이 기괴하고도 완벽한 엠마 스톤과 스멀스멀 피할 수 없는 불편함을 느낀다는 가여움.



일종의 사고실험이다. 인지능력은 갓난아기에 불과하지만 성인의 신체를 가진 사람. 학교는커녕 바깥 세상을 단 한 번도 접해보지 못한 사람. 그래서 시작부터 종잡을 수 없이 기괴하다. 다 자란 성인의 걸음걸이가 온전치 못하고, 언어능력이 떨어져 말을 다 내뱉지 못하며, 보호자를 보면 달려가 점프를 해 안긴다. 심지어 가만히 서 있다가는 시원하게 오줌을 눈다. 그런 행동을 자그마한 아이가 아닌 성인의 모습을 한 사람이 하고 있는 장면들을 보자니 섬뜩하게까지 느껴진다. 그만큼 엠마 스톤의 연기는 완벽하다. 이런 초반부 벨라의 모습은 후반부 정신적으로 성숙한 벨라의 근엄한 말투, 결연한 몸짓과 대비되어 더욱 인상깊게 남는다.

몇 십 년에 걸친 사람의 성장을 이렇게 압축적으로, 또 신체 변화와 무관하게 지켜봄으로써 그것이 매우 괴상하고도 신비로운 일이라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된다.


환상감을 더하는 압도적인 배경음악과, 어안(魚眼)에 가까울 정도로 시야를 왜곡시키는 망원렌즈, 흑백과 컬러를 오가는 전환은 이 기괴함을 증폭시킨다. 관객들로 하여금 영화에, 인물들에 이입하는 것을 자꾸만 방해한다. 이것이 한 편의 영화임을 인지시키는 장치들이 번갈아 등장한다. 그러나 관객들은 그 분위기와 웅장함에 사로잡혀 빠져나갈 수 없다. 벨라의 여정 사이사이 보이는 여행지의 다채롭고 아름다운 풍광 역시 관객들을 매혹시키고, 어쩌면 그 기괴함을 사랑하게까지 만든다.


몸이 다 자라 있는 데서 오는 특징이 있다. 성적인 자극에 일찍 눈을 뜬다는 것. 또 그즈음 외부 세계에 대한 벨라의 호기심은 폭발적으로 증가한다. 때마침 벨라 앞에 등장한 던컨은 벨라에게 새로운 자극이 되고, 벨라는 성적인 즐거움과 세상에 대한 호기심을 모두 충족시켜줄 그와 함께 떠나기로 결심한다. 아니, 그럼 약혼을 한 맥스는? 벨라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일단 던컨과 실컷 놀고 돌아와서 맥스와 결혼을 하겠다고 선언한다.

벨라가 바깥으로 나서는 때부터 고드윈의 진정한 실험이 시작된다. 고드윈은 벨라가 자유의지를 지닌 인간이라고 인정하기에, 자신의 부성애와 불안감을 억누른 채 벨라를 떠나보낸다.


벨라는 리스본이라는 낯선 도시로 떠나 오감을 활용하여 세상을 만끽한다. 다채로운 색깔을 눈에 한가득 담고, 에그타르트라는 환상적인 맛을 삼켜보고, 길거리에서 누군가의 꾀꼬리 같은 노랫소리에 감동도 받고, 알콜에 흠뻑 취해도 본다.

동시에, 벨라는 사고뭉치다. 던컨의 보호와 통제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 자꾸만 도망치고, 끊임없이 ‘무례하고 낯뜨거운’ 행동을 일삼는다. 통째로 한입에 넣어 먹어야 하는 에그타르트를 마구 집어 베어 물고, 술에 취해 뻗기도 하며, 아무 남자와 사랑을 나누고, 사교 모임에서 솔직하고 무례한 성적 발언을 하는가 하면, 또 무도회장에서는 정해진 동작 없이 몸이 가는 대로 막춤을 춘다.

그러나 벨라에게 ‘그래야만 한다’는 것은 없다. 이 모든 것은 ‘polite society’에서는 해서는 안 되는 일이므로 던컨은 자꾸만 벨라를 다그치고 혼내려 한다. 하지만 벨라는 기분이 좋고 행복하게 되는 행동, 솔직하고 당연한 말을 왜 억눌러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벨라가 자라면서 God(고드윈)으로부터 배운 것은, 모든 일을 경험해봐야 한다는 가르침뿐이었다. 아버지로부터 학대와 다름 없는 실험을 당하며 자란 고드윈은 윤리나 규범의 잣대를 떠나 실험정신 하나만으로 자신의 세상을 형성해온 사람이다. 그의 영향을 받은 벨라 역시 사회의 수많은 기준보다 경험론적 사고를 앞세우는 것이다.


그런 벨라이기에, 끝까지 관객들이 예측할 수 없는 선택을 이어간다. 심지어 벨라는 성욕을 충족시킬 수 있고, 돈도 벌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는 생각으로 매춘을 하러 나선다. 그 어떤 윤리적 잣대도 개입하지 않은 채 순전히 실용성의 관점에서 벨라에게 매춘은 최적의 선택이 된다. 또 집으로 돌아가 맥스와 결혼식을 올리던 중 몸의 원래 주인인 빅토리아와 결혼을 했던 알피가 등장해 자신과 가자고 하자, 알피를 따라가기로 결심한다. 맥스에겐 ‘이해할 수 있죠?’라고 할 뿐이다. 악인이었던 알피에게 복수를 하고선 알피를 데리고 집에 와 그의 머리에 염소의 뇌를 넣는다.

모두, 벨라는 경험을 통해 호기심을 해결해야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벨라는 자신에게 신생아 딸의 뇌를 넣은 고드윈을 원망하기보다 그로부터 영감을 받아 알피의 머리에 염소의 뇌를 넣었다. 또 자신의 전생이자 어머니인 빅토리아가 겪어온 삶을 알아보고자 맥스와의 안정된 결혼생활을 뒤로 하고 알피를 쫓아갔다. 맥스에게 기대한 ‘이해’란, 맥스도 고드윈 또는 벨라와 같은 경험론자로서 벨라의 선택을 받아들일 수 있기를 기대한 것일 테다.


벨라의 시행착오와 종잡을 수 없는 선택들을 보며 손에 땀을 쥐게 되고, 조금이라도 걱정스러운 마음을 가진 관객들은 벨라가 의문을 제기하는 그 사회, 규범, 잣대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좋은 것, 옳은 것, 윤리적인 것에 관한 틀에 박힌 생각을 떨쳐낼 수 없는 것이다.

영화 초반부에 집중적으로 쓰인 망원렌즈. 무릇 망원렌즈라면 거리가 있는 지점에서 멀리 있는 사물을 촬영해야 할 텐데, 바로 앞에서 우스꽝스럽게 움직이는 벨라의 모습을 왜곡시켜 괴상한 모습을 더 강조해서 보여준다. 그게 우리, 관객들의 시각이다. 멀리서 한 발 떨어져 객관적으로 지켜보지 못하고 관객들은 자꾸만 사회적 규범과 편견, 예절 등 수많은 잣대를 들이밀며 벨라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못한다. 피하고 싶고, 괴이하다고 여긴다.


벨라는 강에서 낚시대에 걸린 채 고드윈에 의해 건져올려졌고, 그러니까 물고기였다가 고드윈의 실험체가 되었으나 세상을 자유로이 활보한 뒤 온전한 자신으로 우뚝 섰다. 반면 관객들은 ‘가여운 것들’로 전락한다. <괴물>의 감독이 관객들을 괴물로 만들었던 것처럼 <가여운 것들>의 감독은 관객들을 가여운 것들로 만든다. 수많은 경험과 선택을 거쳐 자유의지를 마음껏 발휘하고 온전한 자아를 탐색한 뒤 마침내 자신의 영역을 단단하게 가꿔낸 벨라가 될 수 없는, 사회라는 어항에 가두어진 one of them에 불과하게 된다. 그저 물고기가 되어, 물고기의 눈으로 벨라를 바라보며 도통 이해할 수 없고 불편하다며 뻐끔거릴 뿐인 가여운 것들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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