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롭고 힘겨운 삶을 묵묵히 견뎌내다 지칠 때, 들여다보면 보이는 그 고된 삶들의 따스한 연대.
케이코에게 체육관은 세상이고, 복싱은 인생이다.
케이코의 삶은 단조롭다. 낮엔 호텔 청소부로 일하고, 저녁엔 체육관에 나가 복싱을 연습한다. 말이 통하지 않아 어린 시절 따돌림을 당하고 쉽게 상상하기 어려운 고난을 겪었을 케이코. 프로 복서가 되었지만 재능이 뛰어나진 않다. 프로 선수임에도 맞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래서 상대 선수와 적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데 실패하고 너무 가까이 다가서거나, 뒤로 물러나기 일쑤다. 심지어 귀가 들리지 않으니 순간적인 대처를 하기도 불리하고 링 바깥의 코치가 외치는 지시도 들을 수 없다. 케이코는 그저 근성과 노력만으로 승리를 일궈내왔다. 그래서 케이코는 연습을 쉬는 것을 두려워한다. 체육관이 사라진다면, 복싱을 그만둬야 한다면, 케이코는 무너질지도 모른다.
카메라는 어두운 강변에 케이코가 홀로 서 있는 모습, 좁은 방안에 우두커니 앉아 있는 모습을 반복적으로 비추고, 그럴 때마다 숏의 시간적 길이도 길다. 케이코는 도통 말을 하지 않는다. 힘든 일이 있냐는 동생의 물음에도, 삶은 원래 혼자고 말을 해도 해결되지 않는다며 퉁명스럽게 받아친다. 살아내는 것이 너무나도 힘겨울 텐데, 말을 하지 않으니 그 아픔이 더 무겁고 안쓰럽게 다가온다. 강변에 서 있는 모습을 보면 조마조마하다. 위태롭다고 느낀다.
케이코는 자신을 아껴주고 가르쳐준 회장님에게 마지막 편지를 쓴다. 당분간 복싱을 그만두겠다고. 그런데 편지를 전달하기 전 회장님이 체육관을 닫기로 결정했다는 소식을 보내온다. 어쩌면 이렇게 될 운명이었는지도, 여기까지였는지도 모른다. 회장님은 케이코를 위해 다른 체육관에 케이코의 코칭을 부탁해두었지만, 케이코는 너무 멀다는 핑계를 대며 이미 단념한 마음을 열지 않는다.
연습이 끝나고 집으로 가는 길, 케이코는 골목의 계단에서 회장님을 마주쳤다. 자신은 인생을 바쳤는데, 속이 문드러져도 복싱 하나 바라보며 견뎌왔는데, 이렇게 갑자기 체육관을 닫는다니 야속할 뿐이다. 케이코는 어느 날 저녁 체육관으로 향하는 계단을 내려가지 않고 집으로 향한다. 좁은 방에 틀어박혀 있는다. 휴식을 두려워하던 케이코였지만, 이제 모든 것을 그만두기로 마음먹게 된 것이다. 그러고는 다음 날 끝내 편지를 전달하기로 결심하고 체육관으로 향한다.
“다음 경기 기대할게.”
마지막 인사를 하러 체육관에 들어서는 순간, 이 영화의 첫 번째 마법이 시작된다. 케이코는 복싱 경기 중 지시를 들을 수는 없지만, 대신 주변을 섬세하게 살펴보고 사람들의 눈짓, 손짓을 유심히 볼 수 있다. 체육관 안쪽에 앉은 회장님은 케이코의 경기 영상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피드백할 거리를 찾고 있는 듯했다.
이제 눈물 파티가 시작된다. 다시 밖으로 나온 케이코는 편지를 구겨 주머니에 쑤셔 넣고 들어가 회장님에게 인사를 건넨다. 회장님은 케이코를 웃으며 반기고는 케이코와 거울 앞에 서서 복싱 동작을 함께 연습한다. 케이코는 눈물을 흘리면서, 미소를 지으면서 동작을 따라한다.
닫힌 마음을 활짝 열고 살아낼 힘이 충만하게 된다.
회장님은 쓰러져 입원을 하고 체육관도 끝내 닫게 된다. 케이코는 병문안을 가 회장님의 와이프에게 자신의 그림과 일기를 보여준다. 와이프의 목소리로 일기가 낭독되고, 케이코의 단조롭고 기특한 하루하루가 플래시백 장면으로 보인다. 그러더니 회장님이 눈을 뜨고 케이코의 일기 내용을 듣고 있는 장면으로 전환된다.
케이코는 그렇게 다음 경기도 열심히 준비한다. 회장님의 와이프가 “다음 경기 기대할게!”라며 건네는 진심어린 응원에, 힘차게 “하이!”라고 대답한다. “프로가 되고 싶어?”라는 회장님의 질문에 “하이!”라고 외친 뒤, 처음으로 큰 소리로 다짐을 한다. 회장님은 쓰러지고 체육관은 폐업 준비를 하는 와중에도 코치들은 성실하게 케이코의 다음 경기를 위해 연습을 돕는다. 코치는 스파링 연습을 하던 중 눈물을 참지 못한다. 케이코는 그런 코치를 보고 미소짓는다. 모두가 연약한 마음을 붙들고 슬픔을 버텨내면서,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최선을 다한다.
코로나로 관객은 들어갈 수 없어 경기장은 텅 비어 있다. 주변 사람들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케이코의 생중계를 지켜본다. K.O.를 당해 패한다. 하지만 케이코는 다시 일어난다. 또 경기장에 응원을 해주는 관객이 없어도 상관없다. 케이코는 주변에 자신을 아껴주는 많은 사람들이 있음을 알고 있다.
케이코가 패배하는 걸 본 회장님은 아쉬움에 이어폰을 내려놓지만, 이내 “요시!”를 외친다. 그러고는 직접 휠체어를 끌고 긴 복도를 지나 문밖으로 퇴장한다.
“지난 경기 감사했습니다.”
마지막 시퀀스는 또 하나의 마법이다. 회장님이 선물해준 붉은 색 모자를 쓴 채, 케이코는 달리기 연습을 하던 중 멈추고는 내리막길에 홀로 있다. 그때 공사장의 인부 한 명이 케이코에게 다가온다. “지난 경기 감사했습니다.” 인부의 얼굴은 케이코처럼 상처가 많다. 프로 복서이면서도 호텔 청소부로 일하는 케이코처럼, 상대 선수 역시 공사장에서 일하면서 복싱에 대한 열정을 놓지 않고 있다. 눈시울이 붉어진 케이코는 다시 올라가 운동을 재개한다. 노을 지는 가운데 케이코의 실루엣이 어느 때보다 힘차 보인다.
이제 케이코는 다시 삶을 살아낼 힘이 있다. 이전처럼 매일 일기를 쓰고, 매일 호텔에서 일을 하고, 매일 복싱을 연습할 것이다. 이전에는 경기에서 승리했음에도 모든 것을 포기하려 했으나, 그 뒤에는 경기에서 K.O.를 당하고서도 일어설 수 있게 되었다. 호텔에서 일을 하면서도, 미소를 지으면서 신입에게 침구류를 정리하는 법을 가르쳐줄 여유를 갖게 되었다.
케이코는 닦아낼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영화에서는 무언가를 휴지나 수건으로 닦아내는 장면이 반복적으로 강조된다. 호텔에서 바닥과 변기를 닦고, 링 위에 떨어진 코피를 닦고, 체육관의 거울을 닦는다. 떨어지고 얼룩지고 더러워져도 닦아내면 된다.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
엔딩 크레딧과 함께 도시의 여러 모습을 멀리서 찍은 장면들이 흘러간다. 무엇 하나 특별할 것 없는 도시에서 힘겹게 지내는 사람들. 영화는 그런 사람들이 서로에게 주는 힘, 그럼에도 버텨내고 견뎌내는 삶의 품격을 여실히 보여준다. 주변을 유심히 돌아보면 나를 향한 애정이, 또 그런 애정을 보내오는 사람들이 각자 견뎌내는 삶의 무게가 눈에 들어온다. 그저 하루하루를 겪어내면서도 마음을 열고 주변을 유심히 돌아본다면, 그런 애정이 고맙고 또 열심히 살아주는 것이 고마워서, 벅찬 감동에 또 열심히 살아갈 힘을 받게 된다.
케이코가 소리를 듣지 못함에도, 역설적으로 이 영화는 듣는 재미가 풍부하다. 체육관이 처음으로 소개되는 장면, 주기적인 줄넘기 소리, 샌드백을 치는 소리, 스파링 연습을 하는 소리가 순차적으로 들리면서 밴드가 합주를 하는 것 같은 리듬감이 강조되고 신이 나기까지 한다. 이 체육관에서 연습을 하는 선수들이 출중한 스타로고 보이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이 이루는 화음은 그 어떤 화려하고 강력한 펀치보다 아름답다.
같은 세상을 살아내는 사람들의 조용하지만 뜨거운 연대감은, 구구절절한 위로와 응원을 담은 음성을 주고받지 않아도 볼 수 있다. 오히려 들리지 않고 말하지 않을 때 더 제대로 느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