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불륜(不倫)은 무엇입니까? 하루 한 편 단막극, 상상 불륜.
걱정이라도 되었던 걸까? 김하은이 지난 일을 언급하며 그에게 안부를 물어왔다. 남유경은 무탈하다고 답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언뜻 듣기에 무척이나 곤란해 보였다. 마치 어쩔 줄을 몰라 전전긍긍하는 것처럼.
물론 순전히 그의 착각이었을 수도 있었다.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소리만으로 어떻게 사람의 마음을 확신하겠는가. 그녀는 단지 상대의 동정심을 유발하여 상황을 무마하는 요령을 발휘하는 중일지도 몰랐다.
그런데 또 따지고 보면 그녀가 사과할 필요는 하등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그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남유경은 그녀의 연락에 각별한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했다.
"요즘 어떤가요?"
그는 요즘 부서별로 분위기가 어떤지 물어 보았다. 그녀는 오다가다 들은 이야기를 운운하며 상황을 전해주었다. 다행히 생각보다 양호했다. 말 그대로, 생각보다는 말이다.
"휴가를 내셨다고 들었어요. 정말 괜찮으신 거 맞죠? 저 때문인 그러신 것 같아서 걱정되네요."
그녀의 말에 특별한 구석은 없었다. 하지만 그는 내딛는 걸음마다 하늘로 붕 뜨는 기분이 들더니 한없이 몽글몽글해졌다. 어쩌면 그녀에겐 사람을 홀리는 마력이 있는 걸지도 몰랐다. 그녀는 그를 움켜 쥐고선 수화기 너머로 온통 흔들어 대었다. 하지만 그는 싫지 않았다. 오히려 좋았다. 그로서는 아픈 구석에 그녀가 향유를 발라준 격이었기 때문이다.
그게 트리거였을까? 그는 마무리되어가는 통화가 애달팠다. 그래서 부지불식간에 꽁꽁 눌러 감춰두었던 욕망을 표출했다. 조금도 우발적이지 않은, 철저히 계산된 출력값으로. 단지 자연어로 제시되었을 뿐인.
"우리 그냥 만나서 이야기 할까요?"
그렇게 남유경은 휴일임에도 회사로 향했다. 김하은은 정문에서 그를 보자마자 점잖은, 그렇지만 너무 예의를 차리지도 않은 인사를 올렸다. 남유경은 그럴 필요 없다며 손사래쳤다.
“휴가 중이신데 저 때문에 여기까지 오신 거예요?”
맞아요.
“아닙니다. 마침 지나가던 길입니다. 개인적으로 김 사원님이 잘 계실지 궁금하기도 했고요.”
“주임님께서 저 때문에 곤란해지셨어요.”
“오히려 제가 더 죄송스럽죠. 이사실에 들어가기 전에 미리 언질을 드렸어야 했는데.”
“이렇게 오시게 만들고…. 진짜 면목 없습니다.”
“사과하지 않으셔도 돼요. 진짜로요. 사실은 저도 김 사원님이랑 비슷한 생각을 했거든요. 그런 차에 맘껏 내지를 수 있어서 오히려 속이 시원했습니다.”
“박 대리님과 싸우신 건은….”
“그것도 원해서 싸운 겁니다.”
“괜찮으시겠어요?”
김하은은 두 손을 모아 우려를 표했다. 남유경은 그 어찌할 바를 모르는 듯한 그녀의 몸짓이, 기가 죽어 내려 앉은 그녀의 얼굴이 가슴 깊숙이 와닿았다. 웃으면 안 되는데, 자꾸 웃음이 나온다.
“그렇게 미안하시면 근처에 카페라도 가실까요? 마침 점심시간인데 브런치 메뉴를 파는 곳이 있거든요.”
그는 그녀를 만난 날에 가려다가 가지 못한 대형 카페가 떠올랐다.
“네, 주임님. 제가 살게요.”
“잘 먹을게요.”
둘은 회삿일에 대해 이야기하며 ‘바이웨이’로 향했다. 예상대로 박 대리는 자신을 금수만도 못한 인간 폐기물로 묘사해 대고 있었다. 팀장들은 죽상이었고 양도광 본부장은 각 부서를 수시로 오가는 의뭉스러운 행보를 보였다. 10분 후 ‘바이웨이’에 도착한 그들은 2층 창가에 자리 잡았다. 그곳은 가로수에 핀 벚꽃들을 눈높이에서 마주할 수 있는 명당이었다. 간간이 개화가 늦은 가지들이 있었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평일 업무 시간임에도 테이블이 빠르게 차고 있었다. 조만간 벚꽃이 만개하면 줄을 서야 할지도 몰랐다.
“주임님은 꽃 좋아하세요?”
“좋아해요.”
“어떤 꽃을 가장 좋아하세요?”
남유경은 마땅히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꽃을 즐기기보다는 꽃구경을 하는 아내를 좋아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내가 좋아하는 꽃을 말하려했다. 하지만 굳이 그렇게까지 거짓말을 할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그는 엄지로 약지를 매만졌다.
다행이다.
그는 오늘 반지를 끼고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러한 배덕감이 안정감으로까지 이어지진 않았다. 그의 마음이 찰랑이다 못해 철썩이기 시작하더니 죄의식이 휘몰아쳤다. 두근-두근. 커져가는 심장 박동 속에 목구멍이 틀어막힌 듯했다. 어쩐지 흉부 어딘가가 따끔한 것 같기도 했다. 그런데 그때였다.
“주임님 너무 예쁘지 않아요?”
그녀라는 역류가 일었다. 가슴에 인 풍랑은 상쇄되어 잦아들었다. 그의 바다가 안온해졌다.
“찍어드려요?”
그녀는 스마트폰을 살짝 움켜쥐었다. 망설이는 것일까? 무엇 때문에? 눈을 두 번 깜빡이는 동안 무슨 생각들이 그녀를 스쳤을까? 그건 세상의 어느 누구도 모를 일이었다. 사람의 의지란 실로 복잡한 연산이어서 결과로서만 과정의 치열함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그녀는 마주한 순간에 얼마나 진심인 것일까? 이마저도 알 수 없다. 단지 그녀가 밝게 웃으며 스마트폰을 내어주는 것을 목격할 수 있을 뿐이다.
그는 일반 사진, 인물 사진, 1배율, 2배율, 3배율에 필터까지 써가며 그가 가진 모든 촬영 기술을 동원했다. 스마트폰을 돌려받은 그녀는 결과물에 크게 만족해했다.
“너무 잘 찍으셨어요. 이런 건 어디서 따로 배우신 건가요?”
아내에게서요.
“찍다 보니 늘었어요. 그나저나 우리 주문은 어떻게 할까요?”
“참, 얼른 시켜야죠. 주임님은 뭘 좋아하세요?”
“뭐든 좋지 않겠어요. 얻어먹는데.”
그녀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도 싱긋 웃었다.
“그래도 드시고 싶으신 게 있으시잖아요.”
배는 고팠다. 하지만 무엇을 먹어야할지 몰랐다. 무언가를 선택하는 것, 그건 그에게 낯선 일이었다. 그는 그녀가 휴대폰으로 찍은 메뉴판을 보며 고민했다. 항상 선택은 아내의 몫이었다. 그는 그녀 앞에서 메뉴 하나 고르지 못하는 선택 장애자로 보이고 싶지 않았다.
“크레페 어떠세요?”
“그리고요? 하나로는 부족할 것 같은데요.”
“하나는 제가 골랐으니 나머지는 김 사원님께서 고르세요.”
김 사원이 메뉴판의 글자를 좇기 시작했다. 위에서 아래로. 그리고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이어서 역순으로. 그녀의 검은 눈동자가 빠르게 움직였다.
“제 눈치 보시는 거 아니죠? 이미 김 사원님은 결정하셨을걸요? 혹시 지금 두뇌와 자유 의지가 충돌하고 있나요?”
그녀는 웃음이 터져 나와 오른손으로 입을 가렸다. 기류가 분분한 가운데 그와 그녀의 눈빛이 서로를 향했다. 그녀의 눈매엔 작은 초승달이 떠 있었다. 청초한 눈동자는 깊고 맑아 한 번 보면 영원히 잊히지 않을 듯하였다. 그는 저릿저릿한 가슴이 한없이 아려왔다. 그럼에도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걸 여태 기억하고 계셨어요?"
"네. 많이 와닿았거든요."
"사실은 딸기 샐러드 먹고 싶었어요. 그나저나 주임님은 말씀을 참 고급스럽게 하시네요? 아닌 듯 하면서도 여유가 있는 것이 뭐랄까, 격조가 있달까요?”
“그렇다고 말하기에는 제가 너무 평범한 사람인 걸요.”
“평범함에도 하나하나의 모습이 있어요. 카메라로 이곳을 찍으면 대부분이 그저 그런 직장인들이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두가 같지는 않아요. 설령 겉모습이 거의 같다고 할지라도 마음의 온도와 주파수까지 동일하지는 못할 거예요. 그건 각자에게 주어진 고유의 영역이니까요.”
“심리학과라 하셨죠? 사람들을 굉장히 잘 이해하고 계시네요. 이리 잘 분석하시는 걸 보니 뭐랄까, 인사이트가 살아있달까요?”
그녀가 이번에는 폭소를 터뜨렸다. 멈추지 않는 웃음에 그녀는 테이블에 엎드려 어깨를 들썩였다. 하지만 안 되겠다 싶었는지 얼굴을 가린 채 상체를 일으키곤 '흠-흠' 소리를 내었다. 차마 가려지지 않은 입술 끝자락에선 명랑함이 흩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진정이 된 그녀는 베시시 웃으며 머리카락을 연거푸 뒤로 넘겼다. 그녀의 이마에 난 잔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렸다.
“아, 나 너무 웃으면 안 되는데. 오늘 사과하는 자리란 말이에요. 이러면 너무 편해지잖아요.”
사랑스럽다.
“편하면 싫어요? 혹시 제가 불편하게 했을까요?”
“아니에요. 저 지금 완전 편해요. 예전에 1층에서 뵀을 때 제가 너무 TMI긴 했죠? 회사에 내향인들밖에 없어서 갑갑해 죽을 지경이었거든요. 그때 주임님 붙잡고 이런저런 얘기하면서 마음 풀었던 거예요.”
“저도 반가웠어요. 어딜가나 새로운 사람은 흥미로우니까요. 신입 사원의 경우엔 지나가는 걸 보기만 해도 마음이 쓰이더라고요.”
특히나 당신은요. 더더욱.
“저희 마케팅 팀에서도 못 받은 챙김을 여기서 받네요.”
“그래요? 혹시라도 제가 부담스러운 자리를 마련했을까 싶어 걱정했는데 다행이네요. 사실은 이사실에서 함께 날뛴 후로 한 번 더 뵙고 싶었거든요.”
“근데 정말 궁금해서 여쭈는 건데요. 저 때문에 그러셨던 건 정말 아니죠?”
“솔직히 아예 없진 않았어요. 차마 하지 못했던 말은 신입 사원이 당당하게 얘기하는데 어떻게 그걸 가만히 지켜보고 있겠어요. 물론 고민은 됐죠. 제지할지 아니면 함께 밀어 붙일지. 만약에 제지한다면 하은 씨만 눈치 없는 사람이 되는 건데, 하은 씨가 얼토당토않는 말을 한 건 아니었잖아요. 그래서 힘을 실어주기로 했어요.”
“주임님, 감사해요. 진짜로요.”
“저는 할 일을 했다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우리는 위로하려고 모인 게 아니라 축하하려고 모인 거예요. 아, 그리고 제가 하은 씨라고 불러도 괜찮죠? 끝에 ‘님’ 자를 붙이니까 너무 경직된 것 같아서요.”
“네 괜찮아요. 그러면 저는….”
“아, 저는 남유경입니다.”
“그게 아니라 제가 유경씨라고 하면 좀 안 맞는 것 같아서요.”
“그건 그렇네요. 하은 씨가 편하신 대로 하세요.”
그러곤 더 이상 대화가 이어지지 않았다. 둘은 서로를 말없이 바라보다가 멋쩍게 웃었다. 그녀가 침을 삼키는 소리를 들려왔다. 아무래도 목이 마른 듯했다.
커피를 먼저 주문해야 했는데. 하은 씨와의 대화에 내가 너무 들떠버렸어.
라디오가 끊기지 않기 위해선 적절한 맺고 나아갈 '쉼 구간'이 필요했다. 때마침 카페의 음악이 클래식에서 재즈로 바뀌었다. 그로버 워싱턴 주니어의 ‘저스트 투 오브 어스’였다. 음량도 둘 사이의 침묵을 가리기에 충분했다. 더없이 적절한 인터미션이었다.
“그럼 제가 주문하러 갈게요. 커피는 뭘 드실래요?”
“저는 콜드 브루로 할게요.”
“알겠어요. 저도 그거 좋아해요.”
남유경은 1층 카운터로 내려가 크레페와 샐러드를 주문했다. 커피 두 잔도 잊지 않았다. 그는 카페의 음악을 따라 콧노래를 흥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