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 불륜(13) : 파란 하늘, 노란 하늘

당신의 불륜(不倫)은 무엇입니까? 하루 한 편 단막극, 상상 불륜.

by 봉봉

남유경은 근처의 정신 병원에 연락을 돌렸다. 여섯 군데에나 문의했지만 모두 당일 진료가 불가능하였다.

“나 같은 정신병자들은 대체 어떻게 살라고 이러는 거야?”


불평해 본들 진료 순서를 앞당길 순 없었다. 그는 공원에 앉아 하늘을 바라보았다. 파란 하늘에 하얀 구름이 조각배처럼 유유히 떠다녔다.


참 평화롭구나. 내 인생은 고달픈데.


남유경은 하늘에서 버린 쓰레기로 빚어진 것인 인간 세상이 아닐까 싶었다. 하늘이 푸르다 못해 새파랗게 질려보였다. 남유경은 눈을 살포시 감은 뒤 햇살을 만끽했다. 눈꺼풀 사이로 빛무리가 춤추듯 일렁였다.


하늘 위의 세상은 어떤 곳일까?


풋. 헛헛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가 생각하기에도 참 엉뚱한 발상이었다. 언젠가 지금과 비슷한 상황을 드라마에서 본 적이 있었다. 제목이 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주인공이 길을 헤매면서도 즐거워했던 장면만은 또렷이 생각났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도 그런 한낮의 해프닝으로 넘길 수 있을 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건 드라마의 에피소드일 뿐이고 현실의 남유경은 짜증이 올라오고 있었다. 스마트폰에서 발열이 일어나 손가락에선 땀이 묻어났고 미끌거리는 액정에 원치 않는 기능이 계속 실행됐다. 간만에 병원에 들러볼까 했건만 진료는 커녕 예약도 못하고 있으니 단순히 화가 나는 게 아니라 광기가 도지는 듯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발신 버튼을 눌렀다. 병원 이름은 ‘푸른하늘정신건강의학과의원’이었다.


"근처에 계실까요? 지금 바로 오실 수 있을까요?"

"네."


예약은 성공적이었다. 데스크의 직원이 30분 뒤에 진료가 가능하다고 했다. 다행히 걸어서 병원까지 딱 그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으니 아주 잘 얻어걸린 셈이었다. 흡족한 그는 태양을 마주 보았다. 눈이 부셨다. 눈부심에 눈물이 흘렀다. 그래도 그는 눈을 뜨려고 했다. 두 번 세 번 네 번 반복할수록 잔상이 뚜렷해졌다. 그는 푸른 하늘의 탁본을 뜨는 중이다.


그렇게 다섯 번을 더 찍어내니 감긴 눈꺼풀 위로 명멸하는 태양의 푸른 하늘을 그릴 수 있었다. 그는 작품에 만족했다. 이제 정신 병원으로 출발해도 되었다.


"오늘 하늘이 좋네."


남유경을 길을 걸으며 오늘따라 왜 이리 하늘에 눈길이 갔는지 되짚어보았다. 간만에 연차를 썼기 때문일까? 그럴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행동한 까닭엔 보다 심오한 의미가 있을 것만 같았다. 그림만 보아도 작가의 심리 상태를 알 수 있듯이 말이다. 횡단보도 앞 신호등이 빨강에서 초록으로 바뀔 때쯤에 머릿 속에 화해지더니 더없이 명쾌해졌다. 그는 확신했다. 고대의 샤먼이 의식을 치렀듯, 그건 그만의 경건한 치성이었다. 남유경은 고개를 비스듬히 들었다. 눈이 조금 부셨다. 하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병원에 도착한 그는 접수를 마치자마자 진료실로 안내받았다. “무슨 일로 오셨을까요?”와 같은 멘트도 없었다. 남유경은 '진료실'이라는 팻말이 붙은 갈색 나무 문을 열었다. 내부로 들어서니 진한 아카시아 향기가 풍겨왔다. 메인 칼러는 베이지와 아이보리였고 포근하면서도 모던한 것이 회사의 라운지와 비슷했다. 긴 안락의자와 최면 도구가 있는 상상 속 정신과 진료실과는 딴 판인지라 다소 실망스럽기도 했다.


의사는 앉으라는 듯 검은색 사무용 의자를 가리켰다. 남유경은 그 의자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밝은 배경 속에서 홀로 어두운 것이 “이 곳은 병신 전용석이야” 하고 낙인을 찍는 듯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는 병신이 맞았다. 그가 스스로 병신이라고 자신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는 한 치의 의심 없이 병신이 맞았다. 병신이 아니고서야 누가 정신 병원에 오겠는가?


“무슨 일로 오셨을까요?”


의사는 나이가 지긋해보였다. 할머니라 하기에는 그렇고 그의 어머니뻘 정도 되었다. 오는 길에 삐딱 선을 타기라도 했는지 그는 의사의 성별도 탐탁지 않아 했다.

여자가 무슨 남자 마음을 안다고….

남유경의 그득그득한 불신을 감추며 답했다.

“정신병자라서 왔어요.”


이윽고 그는 그간에 있었던 모든 일을 줄줄 읊었다. 간담회에서 있었던 일, 직장에 대한 불만, 박 대리와의 갈등까지 전부.

“특히 그 박 대리가 제일 거슬렸어요. 한 번은 그 자식이 LLM이 뭔지 묻더라고요. 제가 인공지능에 문외한이긴 했지만 설마 그걸 몰랐을까요. 명색이 AI사업부 소속 사원인데요. 그때 ‘대규모 언어 모델’이라고 답하면 됐는데 갑자기 머릿속에 하얀 안개가 끼더니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어요. 이게 브레인 포그인가요?”

의사는 두 손을 모아 끄덕였다.

“우리의 뇌는 극심한 스트레스 상황에서 오류를 일으키곤 합니다. 환자 분께서 기획하시는 AI 프로그램에서 에러 코드가 나는 것처럼요. 브레인 포그 현상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 의사는 지금 진짜로 공감하는 중일까 아니면 공감하는 척 연기하는 중일까?


남유경은 의사의 역할 놀이에 놀아나고 있는 듯해 기분이 떨떠름했다. 하지만 이내 생각을 고쳐먹었다. 둘 중 어느 쪽이든 의사를 탓할 일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의사는 그저 제 할일을 하고 있을 뿐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그는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환자 분, 궁금한 게 있습니다. 이사실에서 함께 열변을 토했던 김하은이라는 사원은 환자 분과 어떤 관계일까요?”


방금 전까지 잘 떠들었던 남유경이 말을 멈추었다. 연신 입술을 빠끔거리며 말할 듯 말 듯 하여선 대화를 진전시키지 못했다. 의사는 무언가를 포착했는지 놀려두고 있던 펜을 쥐어 들었다. 남유경은 분석당하는 듯해 기분이 나빴다.


내가 너무 솔직했나?


그는 그녀에 관해 언급하고 싶지 않았다. 정확히는 그녀를 감추고 싶었다. 그녀에 대한 생각, 감정, 느낌 등 모든 것은 판도라의 상자에 고이 머물러야 했다.

“오다가다 마주친 신입입니다. 얼굴 정도만 알고 있었고요.”

“그렇군요. 그러면 아내 분과의 관계는 어떨까요?”


왜 아내를 언급하는 것이지?


“사랑합니다.”

“아내분은요?”

“무엇을 말씀하시는 거죠?”

“아, 죄송합니다. 아내 분께서도 남편 분을 똑같이 사랑하실까요?”


남유경은 갑자기 짜증이 났다.


“그게 치료와 무슨 관련이 있죠?”

“환자 분과 관련된 모든 정보가 치료에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제 가족에 대해서는 말하고 싶지 않아요.”

“실례를 무릅쓰고 조금만 더 여쭙겠습니다. 저는 환자 분의 치료를 위해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혹시 아내 외의 가족 관계에 대해 여쭈어도 될까요? 가령 어머니와 아버지 같은?”

“지금 취조를 하시는 겁니까? 아니면 치료를 하시는 겁니까?”


남유경을 검지로 엄지 손톱을 긁기 시작했다. 하지만 의사는 집요했다.


“환자 분을 위해서입니다.”


그는 잠시 고민하다 입을 떼었다.


“다음 생에는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습니다.”


의사는 그를 향해 찬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질문했다.


“최근 수면 컨디션은 어떠셨을까요? 보통 몇 시에 자서 다음 날 몇 시에 일어나시나요? 또 평균적인 수면 시간은요?”

“불규칙합니다. 잠에 드는 것이 어렵습니다.”

“알겠습니다. 오늘 따로 일정이 있으실까요? 검사를 하고 가셨으면 합니다.”

“무슨 검사일까요?”

“기본 심리 검사입니다. 환자 분의 스트레스 정도를 비롯한 전반적인 마음의 상태를 확인하는 과정입니다.”

“알겠습니다.”


진료실은 나온 남유경은 검사실로 갔다. 침대에 누우니 직원이 전신에 금속 집게를 연결했다. 직원은 그에게 편히 누워 있으라고 했다.


“환자 분, 지금부터 스트레스 검사 진행하겠습니다. 말하거나 움직이시면 측정이 정확하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는 침대에 가만히 누워 있었다. 검사 시간은 5분 정도 밖에 걸리지 않았다. 이어서 직원이 상담실로 안내했다. 직원은 그에게 두꺼운 설문지와 OMR 카드를 건넸다.


“지금 하시는 건 문장 완성 검사와 다면적 인성 검사입니다. 너무 고민하지 마시고 생각나는 대로 바로 응답해주세요.”

남유경은 검사지를 펼치자마자 한숨을 픽픽 내쉬었다. 문항의 개수가 말 그대로 더럽게 많았기 때문이다. OMR 카드에 응답을 기록하는 내내 손 근육이 저렸다. 그래서 뒤로 갈수록 펜촉이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듯 하였다. 마지막으로 문장 완성 검사 작성할 때는 피곤하고 성가셔서 대충 휘갈겨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한 문항이 그의 시선을 움켜쥐었다.

4. 내 생각에 가끔 아버지는 [ ]


남유경은 혀로 입술을 핥았다. 날이 건조해서 갈라지기라도 했는지 계속 따끔거렸다. 그래서 앞니로 입술을 깨물었다. 갈라진 틈 사이로 시큼한 쇠맛이 올라왔다. 손가락으로 닦아보니 선홍빛 액체가 틴트처럼 주욱 묻어났다. 책상에 휴지가 비치되어 있지만 쓰지 않는다. 그는 출혈이 멎을 때까지 혀로 입술을 핥았다. 당연히 맛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멈추지도 않았다. 그는 잠시 고민하다가 펜을 향해 명령했다.


4. 내 생각에 아버지란 작자는 언제나 인간 이하의 벌레였으며 지금도 내 삶을 갉아먹고 있다.


검사가 끝난 후 남유경은 대기석에서 잠깐 기다린 후 진료실로 재입장했다. 의사는 검사지를 손에 쥐고 걱정스레 말했다.


“환자 분 스트레스 수치가 매우 높습니다. 자율 신경 활성도가 낮고 교감 신경과 부교감 신경의 불균형이 심각해요. 이건 쉽게 말해, 우리 몸에 에너지는 고갈되었는데 잔뜩 긴장해서는 풀악셀을 밟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브레이크도 고장나서 멈출 수가 없는 상태이죠. 언제 사고를 낼지 모르는 급발진 자동차입니다. 그동안 많이 힘드셨을 텐데 어떻게 버티셨을까요?”

“모두 힘들게 살지 않나요?”

“그로 인해 일상생활에 지장이 생겨서는 안 되겠죠. 이 수치만 놓고 보면 당장 적극적인 치료가 필요해 보입니다.”

“제가 어디가 병신이라서 그러실까요?”


남유경은 자신도 모르게 욕지거리를 내뱉고 말았다. 그는 입을 가리곤 의사에게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나머지 문장 완성 검사와 다면적 인성 검사 결과는 분석 후 다음에 방문하실 때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재방문 일정을 잡아볼까요?”

“오늘 알 순 없을까요? 제가 직장인입니다.”

“죄송합니다. 당일은 곤란합니다.”

“그러면 내일 오겠습니다. 휴가 중이니까요.”

“내일 오전 10시 어떠실까요?”

“좋습니다.”


남유경은 수납을 마친 후 집으로 향했다. 태양이 머리 위를 지나고 있었다. 하늘이 파랬는데, 노랗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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