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 불륜(14) : 우는 남자

당신의 불륜(不倫)은 무엇입니까? 하루 한 편 단막극, 상상 불륜.

by 봉봉

오늘도 남유경은 출근 시간에 맞춰 정장을 갖추었다. 그는 어제보다는 다소 손에 익은 넥타이를 묶으며 생각했다.


더 자고 싶어. 휴가 중인데도 쉬는 것 같지가 않아.


그럼에도 그는 출근 준비를 서둘렀다. 아내에게 연차를 내었다는 사실을 들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체 이유가 뭘까?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심사가 베베 꼬인 듯했다. 그는 어제에 이어 오늘도 기만당하는 아내가 가여웠다. 그래서 립스틱을 바르는 아내의 등 뒤에 서서, 마치 아무 일도 아니라는 양 커피 한 잔의 여유를 부리며 휴가 중이라고 너스레를 떨까 싶기도 했다. 하지만 그러지 않기로 했다. 얘기한들 유쾌하게 끝날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연차를 냈다고? 왜? 무슨 일이야? 미리 상의할 수도 있었잖아. 그러면 우리 휴가 계획은 어떻게 되는 거야? 당신은 왜 나한테 아무것도 의논하지 않아? 하긴 오빠는 항상 이런 식이었어. 우리 결혼할 거잖아. 그러면 서로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있어야 하지 않겠어? 부부라면 한 몸처럼 지내야지. 오빠 혼자 살려는 거 아니잖아. 정말 이제는 더 이상 홀몸이 아니라니까? 계속 그렇게 할 거면 나가서 혼자 살지 왜 나랑 살아? 오빠 진짜 나한테 그러는 이유가 뭐야?


그의 두뇌 속에서 언어 모델이 가동됐고, 아내와의 경험을 빅 데이터 삼은 대화 로그가 끊임없이 출력되었다. 이에 남유경은 넥타이를 꽉 조이며 자연어 로직을 활성화했다.


아내가 묻지 않았으니 먼저 알리지 않는다.


실로 완벽한 프롬프트였다. 인풋이 없어 아웃풋이 없다는 데 어떤 이견이 있겠는가? 고로 그의 알고리즘은 무결하였다.


남유경은 아내와 키스를 나눈 뒤 정신 병원으로 향했다. 아내는 남편에게서 달라진 낌새를 조금도 눈치 채지 못했다. 그만큼 그의 연기는 완벽하였고 모든 과정이 순조로웠다. 하지만 병원으로 향하는 내내 아내에게 휴가 사실을 알리지 않은 것이 자꾸만 신경쓰였다. 그는 당장에라도 아내에게 문자를 넣을 수 있었다. 필요한 건 작 10초 남짓한 시간뿐다. 하지만 그는 악착같이 텼다.


내가 휴가 중인 걸 알면 아내도 휴가를 내겠지. 그러면 가까이 국내 여행이라도 다녀올 수 있을 거야. 아내는 옛날부터 꽃을 좋아했으니까.


버스가 빨간 신호를 받아 정차하였다. 남유경은 인도에 비치된 화단을 보았다. 팬지가 가득 피어있었다.

만연한 봄이야. 벚꽃, 진달래, 개나리, 튤립, 조팝나무…. 모두 아내를 행복하게 하는 것들이지. 봄의 결실은 참으로 짧아서 때를 놓치면 일 년을 새로 기다려야 해. 하, 아내가 꽃 구경을 가고 싶다며 노래를 불렀는데. 나는 한 철의 영예를 아내에게 헌사할 수 없어. 그래서 아내는 나 때문에 꽃을 보지 못해. 가엾은 그녀는 속절 없이 1년을 또 기다려야 하겠지. 전부 내가 무능한 탓이야. 꽃들은 한살이를 살아도 제 몫을 다한지만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온 세상이 꽃천지야. 아름드리 피어나 봄의 시작을 알리곤 흐드러지게 만개하여 미련 없이 져. 나는 한 번이라도 꽃잎을 틔워본 적이 있을까? 꽃잎은 고사하고 어둡고 축축한 땅속에서 겉껍질째 썩어가는 씨앗이 나일지도 몰라.


그의 눈 앞에 조팝나무 군락이 펄쳐졌다. 하이얀 꽃잎 사이로 아내가 나타났다. 아내는 활짝 웃고 있었다. 그는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들어 아내를 촬영했다. 이윽고 지이익 소리를 내며 사진이 인화되었다. 들어서 확인하니 아내가 없었다. 오직 봄날의 전경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었고 적막한 고독이 그를 사무치게 하였다. 그래서 그는 울었다. 쏟아지는 슬픔 속에 유일하게 실감났던 것은 오직 두 뺨을 적시는 뜨거운 눈물뿐이었다.


버스의 모든 승객이 그를 보며 수군댔다. 하지만 그는 타인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니, 도무지 체면을 차릴 재간이 없었다. 그의 마음은 이미 무너져내렸고 발을 내딛으면 온통 걸려서 넘어질 것 투성이였다. 그는 행려병자였고 제 힘으로 일어설 수 없는 불구였다. 그러니 우는 일 말고 달리 할 있는 이 있겠는가.


나는 아무것도 되지 못해. 좋은 사람도, 나쁜 사람도 그 사이의 무언가도.

절망감은 깊었고, 온 몸의 감각이 그를 벼랑 끝으로 몰아세웠다. 세상에서 가장 무가치한 남자 남유경.


그래서 그는 자신을 경멸하기로 했다. 멈추지 않는 눈물에 사람들은 시선은 마치 짐승을 보는 듯하였다. 결국 '남유경'이라 명명된 인격체에 과부하가 걸렸다. 이내 임계점을 아득히 돌파하여서는 과열된 히트 펌프가 그의 인지 프로세스에 왜곡을 일으켰다.


사람들이 저러는 데는 우는 '사람'이 있어서가 아니라 우는 '남자'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차라리 내가 여자로 태어났다면 어땠을까? 적어도 지금 같이 등신 취급을 받진 않았겠지. 아마 최소한의 동정은 샀을 거야. 내게 깨끗한 손수건을 건네주는 사람도 있었을 테고. 하…. 이딴 생각이나 하는 나는 아내에게 어울리는 남자일까? 그런 내가 과연 아내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을까? 아내는 내가 회사에서 일하는 중일 줄 알 텐데. 이렇게 일언반구도 없이 휴가를 낸 걸 알면 얼마나 배신감을 느낄까? 지금이라도 말해야 할까? 그래, 그게 답이야. 그렇지만 도저히 말을 못 하겠어. 나를 드러내는 게…. 곤란하다 그래서 두렵다.


남유경은 하늘을 보았다. 노랬다. 미세먼지 농도는 ‘낮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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