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은 잘 떠오르지는 않지만 내가 아파서 회피했던 상황이 데자뷔처럼 다시 맞닥뜨려지는 순간도 그렇다.
우리는 아직 해소되지 않은 분노와 슬픔에 갇혀 종종 이 기억들로 무기력해지곤 한다.
그러나 감정을 해소하고 나를 제대로 봐주는 시선을 갖게 되는 순간, 나의 아프고 괴로웠던 모든 순간들은 전부 성장의 순간들로 변하게 된다. 우리는 그 성장의 순간을 제대로 직면하기 위해 왜 그렇게 아프고 괴로웠어야 했는지 똑바로 인지할 수 있어야 한다.
우려되는 것은 가해자들과 방관자들이 교만하게 '내 덕분에 네가 성장했다'는 주장을 하는 것이다. 늘 약자로 살아왔던 우리는 스스로를 언제나 피해자의 입장에만 놓아왔었기에 그러한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더 무너질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이야말로 스스로를 피해자라는 틀에 가둬두는 모습과 다름없다.
나를 괴롭게 했던 가해자와 이를 방치해 왔던 모든 상황과 주변환경에 맞서는 건, 내가 먼저 나를 괴롭게 두는 것을 벗어나는 것부터 시작한다. 그래야 그 교만한 가해자들에게 제대로 맞설 힘을 갖는다.
죽고 싶은 순간을 수없이 버텨냈을 당신에게는 분명 그럴 힘이 있고, 허락만 해준다면 필자가 감히 그 증인이 되고 싶다.
아픔을 직면한다는 것은 단언컨대 직면하는 모든 순간이 괴롭다.
그것은 묻어뒀던 감정이 터지는 것이기에 평소에 조금씩 흘려뒀더라면 차라리 나았을지 모르는 봇물과 같기에 그저 다 털어지는 것까지 스스로를 따뜻하고 다정하게 무엇보다 인내심 있게 기다려주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기에 엄청난 용기가 필요하다. 더는 무력한 약자로만 살고 싶지 않고, 내 삶을 바르게 선택하고 거기에 대한 책임을 지며 살아보고 싶은 삶의 목표가 있었다는 것을 인지하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그동안 그렇게 타인들을 위해 희생하며 살아왔던 힘을 이제는 스스로를 살리는 힘으로 전환하기만 하면 될 수 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지난 글에서 소개했던 <마인드제로>라는 책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활동이 있었다. 바로 내 인생의 굵직한 사건을 추려 '인생 네 컷'의 순간들을 되짚어보고 그 당시의 순간에서 내가 가졌던 가치에 대해 깨우쳐보는 부분이었다. 필자는 이것을 몇 차례의 마음훈련 모임을 통해 사람들 앞에서 어렵게 꺼내고 또 위안을 주고받는 시간을 가졌었는데, 맨 처음 시간에는 이미 긴장으로 목소리도 덜덜 떨리고 울음이 끊이질 않았던 것에 비해 두 번째부터 어느새 덤덤해지고 강해져 있는 스스로를 느꼈다. 감정을 솔직하게 이야기 한 뒤 소수의 몇 명으로부터 그저 위로와 공감을 받아보는 것만으로도, 지난 세월 동안 비난받고 상처받았던 고통에서 비로소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자세한 방법을 소개하자면, 여전히 필자를 사소한 상황에서부터 지적이나 비난을 하는 방식으로 접근을 하는 부모님, 그리고 주변 어른들이 있다. 심지어 요즘은 나이를 불문하고 그러는 경우도 상당하다. 이들은 아마도 필자가 불혹의 나이인 지금은 물론 칠순에도 같은 방법을 고수할 것이다. 이건 어쩌면 그들이 알고 있는 유일하고 당연한 줄 알았던 접근법이기에 어쩔 수 없는 안타까움도 있고, 역사를 배웠기에 살아온 시대와 해소할 수 없었던 불안감을 가진 그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또 그저 그 사람의 성향상 FM을 고집하고 정확한 것을 좋아하는 그저 철두철미한 사람일 수도 있다. 그런데 서로 가치관이나 성향이 다르다고 그것이 비난이나 지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만약 역으로 필자가 그런 사람들에게 '그러는 당신은 왜 그렇게 자기 자신만 옳다는 꼰대 같은 생각과 말투를 지녔나요?'라고 한다면 아마 그것은 틀림없는 다툼이 될 수밖에 없을 테니 말이다. (속은 시원하다.) 어쨌든 이런 비난의 상황에서 맞받아칠 힘이 없는 우리가 먼저 해야 할 일은 상대방의 지적과 비난이 있기 전, 원래의 나는 무엇을 원했었는지에 대해 되짚어보는 일이다.
구체적 상황을 하나 예를 들자면 어린 시절 동생과 장난감 하나 가지고 다투고 있던 나에게 양보를 하지 않는다고 부모님에게 혼이 났던 경우를 살펴보자. 우리는 내가 무언가를 원한다는 이유 하나로 비난과 지적의 대상이 되었지만 사실 장난감을 원했다는 것은 죄가 아니다. 이것은 당연한 선택의 권리였을 뿐이다. 그러면 동생에게 무조건 양보를 강요하기 전에 적어도 이 장난감을 처음에 누구에게 사줬었는지 부모님은 기억했어야 했다. 부모님의 형편이 넉넉지 못해 장난감을 동생에게 물려주길 바랐던 것은 그저 나에게 표현해줬어야 했고 그를 이해 못 할 나는 아니었다. 이는 동생과 나의 막무가내 싸움이 아닌 그저 존중의 문제였을 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한쪽은 양보를 강요받는 것으로, 다른 한쪽은 복종을 강요받는 것으로 강제판결을 받았어야 했다. 자매의 장난감 다툼이 이렇게까지 심오할 일인가 싶겠지만, 사소한 갈등에서도 이렇게 양측에 대한 비난과 강제판결로 종료됐었는데, 더 심각하고 큰 갈등인들 편안하게 풀렸을까 싶다. 부디 개개인이 겪었던 삶의 굵직한 사건을 빗대어 살펴보길 바라는 마음이다. 그 굵고 아픈 사건 속에서 그저 내가 원했던 것을 찾아보길 바란다.
당연한 줄 알아서 그저 복종하고 희생만 하고 살았었는데, 인간은 당연하게도 공통으로 또 개인으로 추구하는 기본적인 욕구가 있다. 그중 가장 존중받아야 하는 것은 생존의 욕구이다. 우리는 때로 부모님의 모진 매질과 윽박지르는 호통을 통해 생존을 위협받았고 그 원인이 대부분 위와 같은 사소한 다툼이 쌓였다가 부모님의 인내심이 한계점을 넘어서부터 심각한 사건이 되어왔었다. 대부분의 원인은 우리가 그저 미성숙하고 나약한 사회적 약자였기 때문이었을 뿐 우리가 타고나서 자라는 것만으로 죄가 될 수는 없다. 이 당연한 것을 여태 풀어내지 못했던 것뿐이다. 지금이라도 성숙해진 지식과 지혜를 가진 성인의 눈으로 우리가 복종당해야 했던 무심하고 무수했던 판결의 순간들을 재심으로 돌려 스스로를 변호해 보길 바란다. 또한 나를 판결하는 대상을 반드시 비난과 지적을 일삼는 미숙할 수밖에 없었던 그 시대에 머물러있는 어른이 아닌, 그저 공감과 격려를 해줄 수 있는 다정하고 성숙한 성장을 이뤄낸 어른으로 바꿔보길 권해본다.
당신은 그저 '나'라는 존재를 존중받고 싶었고, 내가 선택한 것을 인정받아보고 싶었을 뿐이다. 또한 형제자매와 사이좋게 노는 방법을 배워보고 싶었고, 또는 또래 친구와 잘 어울리는 방법을 학습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것을 나를 낳아줬던 부모님이 다정하고 따뜻하게 알려주시기를, 그런 화목한 가족관계와 사회관계를 이어가고 싶었음을 잊지 말기를 바란다. 무지한 무력자에서 용감무쌍한 무사로 당당하게 대응하기 위한 마음을 수련해야 한다.
이럼에도 당신은 여전히 스스로를 아프게 하는 말들에서 벗어나지 못하겠는가?
다음 글에서는 가정에서 벗어나 첫 사회생활이었던 학교라는 사회에서 겪었을 법한 억울하고 서러웠던 사건들을 다시 성장으로 풀어볼 수 있길 바란다. 꼭,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