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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보라 Apr 19. 2024

감히 내게 부끄러움을 주는 자는 누구인가

#자신과 타인을 구분해야 보이는 진짜 나의 감정

우리는 남에게 그리고 자신에게 무례했었다. 감정을 보살펴 스스로 성장하려 하지 않았고 사회 체계에 의존해 인정욕만 채워왔었다. 그렇게 쌓인 불편한 감정을 불편한 태도로 문득문득 분출했었고 그럴 수밖에 없었다.


흥미로운 건, 내가 감정을 분출했던 대상은 아이러니하게도 '그래도 될 것 같은 만만한 상대'에 국한되었다는 점이다. 알게 모르게 나 역시 가장 자아가 약해지고 무너졌던 그 순간에 사회에 만연했던 권위적이고 굴욕적인 서열화에 흡수될 수밖에 없었고, 바르게 해소하는 방법을 몰라 살아남기 위한 생존의 방법으로 별 수 없이 무기력하게 그 문화를 따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당연히 강도의 차이는 있었다. 때로는 어설픈 권위자를 만나 한 팀이 됐을 때 답답했던 경험이 있듯이 필자 역시 그랬다. 따르기 싫었던 그 사회 룰을 억지로 따라 스스로를 살리고자 했을 때  정말 어설프고 나약한 꼴이었었다. 지식의 차이라고 하기에도 우습고, 권위적인 힘을 제대로 가지려면 팥도 콩이라고 부르는 것을 주장할 힘만 있으면 됐었는데 이를 끝까지 뻔뻔하고 대범하게 지를만한 힘조차 없었던 것이다. 너무 어설픈 위악은 또 다른 실패를 맛보게 했고 그로 인한 부끄러움 역시 스스로의 몫이었다. 그리고 이 부끄러움의 원인을 어떻게든 외부에서 찾아내 다시 감정의 책임을 전가하고자 했었다.




부끄러운 기억을 들춰보기 전에 하나같이 사회적 체면을 차리고 있는 사람들은 말한다. 그런 감정이 든 적이 거의 없다고.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말이다. 감정이라는 목록에 있는 모든 감정은 분명 존재하지만 그 감정을 일일이 느껴본 적이 없다면 일단 의심을 해야 한다. 과연 나는 사람인가 로봇인가? 나는 나를 인간으로서 보호하고 싶은 것인가 그저 생산적이게끔 혹사하고 싶은 것인가?


당신이 사회적으로 성공했을지언정 스스로를 보호하고 보살피는 방법을 찾고 싶다면 고민하라. 지금까지 부끄러웠던 순간을 어떻게 모면해 왔는지, 그렇게밖에 이겨낼 수 없었던 스스로가 얼마나 기특하고 안쓰러웠는지를. 이제는 사회적인 시선으로 스스로를 보는 것에서 스스로를 변호하는 나만의 평가자가 되어 다시 나를 바라보기만 하면 된다.


인간이라면 응당 느껴봤을 감정에서 그 상황을 나의 가치에 알맞게 바르게 해석해내지 못해 잊고 싶었을 뿐이고, 이 또한 제대로 다시 해석해내지 못한다면 아직 살 날이 많은 우리의 삶에서 비슷한 상황이나 순간 그 감정과 연결될 때마다 수치심으로 증폭될 수밖에 없다. 그렇게 올라온 수치심에 감정적 태도와 말로 또 다른 아픔을 창조해 낸다. 언행이 권위적이고 강해 보이는 사람일수록 오히려 더 많은 부끄러움을 숨기기 위해 그런 태도를 보인다. 바로 자신의 부끄러움을 자극하는 타인의 모습을 자신과 동일시하며 통제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사회생활의 시작이었던 학창 시절로만 돌아가도 부끄러웠던 기억은 수없이 많다. 만일 좋은 가정에서 자랐다면 언제나 사랑받고 칭찬받았기에 모두가 나를 집중하고 인정해 줄 것만 같았는데, 냉정한 사회에서 나는 얼마나 평범하고 보잘것없었는지 깨닫게 되었던 순간들은 물론, 사회경험 중 가정에서 받아본 적 없었던 첫 인정을 받았을 때 기쁜 마음으로 가족들에게 자랑했었는데 그게 무슨 대단한 일이냐는 듯 시큰둥하게 무시를 당했던 순간들이 그럴 것이다. 처했던 상황이 얼마나 무난하고 극단적이었는지 따위는 관계가 없다. 그저 차올랐던 감정을 얼마나 잘 읽고 파악해서 해소했는지가 중요하다.


사람은 혼자는 살 수 없다. 아무리 우월한 사람일지라도 내가 우월하다는 것을 입증해 줄 타인이 필요하다. 그러기에 우리는 결국 관계가 필요하고 그것을 나의 우월한 부분과 곁들여 내게 유리하게 살아가는 것이다. 다만 그럴 때, 누군가가 지나치게 희생하지 않아도 괜찮을 수 있는 안전한 사회가 기반이 되어야 한다. 내가 누군가를 갉아먹고 우월해진 다는 것은 착취에 불과할 뿐임을 모르는 건 아닐 테다. 가장 먼저 파악해야 할 것이 바로 이 부분이다. 과연 나는 누군가에게 적절히 이용되고 있는지, 그 안에서 나는 안전하게 보호되고 있는지, 혹은 내가 누군가의 희생을 과도하게 이용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나 스스로 판단할 힘이 있어야 한다.


가족이나 학교, 회사 등 별 수 없이 속해있어야 하는 곳에서 특히나 이런 판단이 스스로 서지 않아 피해를 보는 경우가 많다. 그 상황에 처해지기 시작했을 때는 인지조차 못하다가 한참이나 극단으로 몰아붙여졌을 때에서야 무언가가 균형이 잘못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게 되지만 대처할 힘을 이미 잃었기 때문에 스스로를 더더욱 몰아붙이게 된다. 그것은 곧 죄책감과 모멸감, 무력감 등으로 이어져 다방면으로 스스로에게 굴욕감을 주게 된다.


태조왕건 드라마의 궁예 대사를 한번쯤 들어봤을 테다.

"누가 기침소리를 내었는가?"

궁예는 누군가의 기침소리마저 자신을 공격하는 것으로 받아들인 권력욕의 끝판왕 인물로 자신의 신하조차 적으로 간주해 신뢰할만한 이들을 쳐내게 되고, 결국 스스로를 망가뜨리는 결과를 맞았었다. 역사를 단순히 누군가의 승리와 패배로 볼 것이 아니라 감정을 제대로 해소하지 못했을 때, 가진 권력조차 스스로 쉽게 무너뜨리고 부서질 수 있다는 것까지 섬세하게 살펴보면 알 수 있다.


부러운 감정을 제 때 수용하지 못하면 부끄러운 태도로 표출되듯이, 부끄러운 감정 역시 제 때 수용하고 해소하지 못하면 모멸감으로 이어져 과도한 권력욕이나 과도한 희생양을 만들어 내는 결과를 낳는다.

인터넷에 검색만 해도 나오는 감정목록들을 찾아, 부정적인 감정부터 하나씩 추스르고 내가 그런 감정을 겪었던 상황들을 찾아 지금부터라도 바르게 해소해야 하는 것이 바로 우리가 스스로를 보살피는 가장 확실한 정답이다. 다만 이것이 어려울 때에는 전문가를 찾아가거나 또는 함께 이 감정을 해소해 줄 수 있는 사람들과의 모임을 통해 지지와 격려를 바탕으로 안전하게 해소해 보길 바란다.


더불어 마음훈련소는 바로 이런 것들을 함께 극복하기 위해 만들어진 공간임을 기억해 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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